「낙형지이일건석척숙오신흥팔자소액 시이사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536
한자 樂兄持貽日乾夕惕夙𤕻晨興八字小額 詩以謝之
영어공식명칭 Writing A Poem And Give It In Return For Receiving A Small Frame To Nakjae
이칭/별칭 「낙재 형이 '일건석척 숙오신흥' 여덟 자 소액자를 가지고 와서 주기에 시를 써서 답례로 주다」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곽명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53년 - 「낙형지이일건석척숙오신흥팔자소액 시이사지」 저자 손처눌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34년 - 「낙형지이일건석척숙오신흥팔자소액 시이사지」 저자 손처눌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784년 - 『모당집』 간행
배경 지역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산79-4]지도보기
성격 한시|칠언율시
작가 손처눌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지역에서 강학 활동과 구국 활동을 한 손처눌서사원에게 작은 액자를 받고 답례로 지어 준 한시.

[개설]

「낙형지이일건석척숙오신흥팔자소액 시이사지(樂兄持貽日乾夕惕夙𤕻晨興八字小額 詩以謝之)」의 저자 손처눌(孫處訥)[1553~1634]의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자는 기도(幾道)이고, 호는 모당(慕堂)이다. 아버지는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탄(李坦)의 딸이다.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서사원(徐思遠)[1550~1615], 곽재겸(郭再謙)[1547~1615], 류요신(柳堯臣)[1550~1618]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1592]이 발발하자 대구의 지역 인사들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서사원과 함께 대구 지역의 강학 활동에 힘써 대구 문풍(文風)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모당집(慕堂集)』이 있다.

「낙형지이일건석척숙오신흥팔자소액 시이사지」손처눌서사원에게 ‘일건석척 숙오신흥’이라는 글자가 써진 작은 액자를 받고서 답례로 지어 준 한시이다. 제목에 등장하는 ‘일건석척(日乾夕惕)’은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쓰고 저녁까지 삼가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인데, 『주역(周易)』에 나오는 구절이다. ‘숙오신흥(夙寤晨興)’은 일찍 잠에서 깨어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2001년 발행한 『국역 모당선생문집(國譯 慕堂先生文集)』에서는 「낙형지이일건석척숙오신흥팔자소액 시이사지」의 제목을 쉬운 우리말로 풀이하여 「낙재 형이 ‘일건석척 숙오신흥’ 여덟 자 소액자를 가지고 와서 주기에 시를 써서 답례로 주다」라고 표기하였다.

[구성]

「낙형지이일건석척숙오신흥팔자소액 시이사지」는 칠언율시(七言律詩)이다.

[내용]

유액연래기천형(誘掖年來冀踐形)[오래전부터 인도하여 주시어 천성 실천을 바랐는데]

종이팔자환성성(終貽八字喚惺惺)[여덟 자로 마침내 마음 항상 깨어 있게 하여 주셨네]

일건석척기사경(日乾夕惕旡邪敬)[일건석척 네 글자는 사특함이 없는 공경이요]

숙오신흥불식성(夙寤晨興不息誠)[숙오신흥 네 글자는 쉼 없는 정성을 뜻한다네]

반굴용사해점화(盤屈龍蛇諧點畫)[용과 뱀이 서린 듯 점과 필획 서로 조화를 이루고]

정녕전회질신명(丁寧鐫誨質神明)[곡진히 써내려 간 가르침은 정신을 맑게 하여 주는구나]

종금작아심부칙(從今作我心符則)[이제부터 나는 여덟 글자로 마음의 부절 삼아서]

상목존존검칠정(常目存存撿七情)[항상 바라보면서 두고두고 칠정 잘 단속하리라]

[특징]

「낙형지이일건석척숙오신흥팔자소액 시이사지」는 ‘경(庚)’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칠언율시이다. 2행의 운자 ‘성(惺)’은 ‘청(靑)’ 계열의 운목이지만 인운(隣韻)으로 통운(通韻)하였다.

[의의와 평가]

「낙형지이일건석척숙오신흥팔자소액 시이사지」의 저자인 손처눌서사원임진왜란 때 대구 지역의 의병장으로서 목숨 바쳐 적에게 맞섰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의기투합하여 대구 문풍 진흥을 위하여 선사재(仙査齋)와 연경서원(硏經書院)을 중건하며 강학에 힘썼던 인물들이다. 서로를 사우로 대우하면서 학문적 교유를 끈끈히 이어 갔던 대구 문인의 정성스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액판(額板)을 받고 사례로 지어 준 한시이기 때문에 서술적이고 산문적인 경향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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