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기 속의 청송 사람, 신라 말 고려 초 청송 지역의 호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1486
한자 激動期-靑松-, 新羅末高麗初靑松地域-豪族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고대/남북국시대/통일신라,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류영철

[개설]

고려 초 청송 지역에는 보성부(甫城府)가 설치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서 공통으로 표현하기를 보성부는 명주관내(溟州管內) 야성군(野城郡)의 영현(領縣)인 진안현(眞安縣)과 상주관내(尙州管內) 문소군(聞韶郡)의 영현인 진보현(眞寶縣)을 합친 것이라 하였다. 진보성(眞寶城)은 진보현이며, 재암성(載巖城)진보현과 인접한 진안현으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비록 『삼국사기』에는 재암성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으나 『고려사』 지리지의 예주속부(禮州屬府) 보성부 조에서는 “고려 초에 진보현진안현을 합쳐 보성부라 하였고, 그 보성부재암성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진보현진안현에 후삼국 통일 과정과 무관할 수 없는 대표적 호족인 홍술(洪術)[?~928]과 선필(善弼)[?~?]이 있었으며, 이들의 활동 양상 분석을 통해 보성부 성립의 의미와 보성부재암성이라 불린 연유 또한 살펴보기로 한다.

[격랑의 와중에도 청송엔 미풍이]

청송 지역은 신라·태봉·후백제의 1차 후삼국 정립기는 물론, 신라·고려·후백제의 2차 후삼국 정립기에도 초기에는 사료상 그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지리적으로 동해안 쪽 가까이 있어 태봉과 후백제, 그리고 고려와 후백제 간의 쟁패기에 그 주된 전장에서 비켜 있던 탓이었다.

사료상 청송 지역의 존재가 처음 확인되는 것은 922년(태조 5) 진보성 성주 홍술이 고려에 귀부하였다는 자료이다. 그리고 『고려사』 세가(世家)에 “930년(태조 13) 정월에 고창전투 직후 영안(永安), 하곡(河曲), 직명(直明), 송생(松生) 등 30여 군현이 고려에 귀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의 송생이 청송에 비정된다. 그 외에 살펴지는 것이 재암성 성주 선필에 관한 기록 정도인데, 이들 관련 기록을 살펴보아도 청송 지역이 전장터였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즉, 고려의 근거지인 개경 지역에서 경기와 충청 지역을 거쳐 신라권역인 경상도로 진출하는 주요 교통로에서 청송은 약간 동쪽으로 비켜 있었던 관계로 대구, 의성, 안동, 영천, 경주 등의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쟁의 직접적 피화는 입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927년 견훤의 경주 침공 시 함락된 영천 지역의 경우나 홍술이 전사한 이듬해의 의성전투에서 보듯이 바로 인접한 지역의 참상은 늘 청송 지역의 존망을 고민하게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청송이 전장터였을 가능성은?]

자료상 후삼국 쟁패기에 청송 지역이 전장터였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 11년 8월조에 “견훤이 장군 관흔(官昕)을 시켜 양산(陽山)에 성을 쌓으니 왕이 명지성(命旨城)의 원보(元甫) 왕충(王忠)을 보내어 이를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관흔이 물러나 대량성(大良城)을 지키며 군사를 보내 대목군(大木郡)의 벼를 베어가고 드디어 오어곡(烏於谷)에 둔을 치니 죽령(竹嶺)길이 막혔다. 이에 왕충 등을 시켜 조물성(曹物城)에 가서 정탐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에 등장하는 오어곡이란 지명과 관련이 있다.

오어곡의 위치 비정과 관련해서는 우선 동일지명이 나오는 예로서 규장각(奎章閣) 소장 『읍지(邑誌)』 중 도서번호가 12174인 『진보읍지(眞寶邑誌)』의 방리조(坊里條)에 ‘오어면 미곡(烏於面美谷); 서거이십오리(西巨二十五里)’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자료의 오어면 미곡이 곧 오어곡이라 한다면 오어곡은 진보의 서쪽 인근 지역으로 비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합천 지역에서 약목 지역으로 진출한 후, 오어곡에 주둔하여 죽령로를 막았다는 사료의 내용으로 미루어 오어곡을 진보 지역으로 비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며, 이미 진보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선필의 존재도 그러한 선택을 망설이게 한다.

한편 『동사강목(東史綱目)』의 태조 11년 8월조에서는 오어곡성을 ‘일명 부곡성(一名缶谷城)’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표현과 관련하여 부곡성을 의흥군(義興郡), 곧 현재의 군위 부계(軍威缶溪)로 비정하는 문경현 교수의 견해가 있다. 부곡(缶谷)과 부계(缶溪)를 발음이 비슷한 것만으로 동일지명으로 연결시키기에는 근거가 박약하나 당시의 쟁패 상황과 관련하여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견해이다. 또 하나의 가설은 『고려사』의 왕순식(王順式) 부 선필전(附善弼傳)에 선필이 고려에 귀부하기 전, 여러 차례 적을 막는 공이 있었다는 표현과 관련하여 청송 지역에도 적들의 침략으로 인한 피해가 있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홍술은 누구?]

홍술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출발은 923년(고려 태조 5) 11월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했으며, 왕건은 원윤 왕유와 경 함필을 보내어 이를 위무하였다는 『고려사』의 기록이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홍술이 아들 왕립을 보내어 갑옷[鎧] 30벌을 바쳤다고 하였다.

그런데 홍술이 어떠한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다만 후대 자료인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의 의성현 인물조에는 ‘이(吏)로서 성주 장군을 삼았다[以吏爲城主將軍焉]’라고 하여 홍술의 출신이 ‘이(吏)’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의 향직조에 따르면 고려는 983년(성종 2)에 향리직을 개편하여 각지의 호족들을 향리로 삼았던 만큼 홍술은 당연히 신라시대의 이직자(吏職者)였고, 이러한 이직은 중앙 파견 형태가 아니라 지역 사정에 정통한 촌주(村主)들이었을 개연성이 크다.

모든 향리들이 촌주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홍술은 진보 출신의 지방 유력자로서 후삼국의 격변기에 진보성 성주가 되었던 것이다. 『이존록(彝尊錄)』 상 선공도보제일(上先公圖譜第一)에 기록된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 초, 호장의 능력은 향병을 한데 묶는 것이다[高麗太祖統合初 戶長之能團結鄕兵]”란 표현의 가장 적합한 예가 곧 홍술일 것이다.

[의성으로의 이주]

928년 7월 견훤의 의성(義城) 침공이 있게 된다. 즉,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르면, 견훤이 의성부를 침공하였으며 여기서 홍술이 전사하였다는 것이다.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처럼 홍술이 처음부터 진보가 아닌 의성에 있었다고 하는 다른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나, 하다다 다카시[旗田巍], 윤희면(尹熙勉), 문경현(文暻鉉) 등 대부분의 학자들은 진보성 성주 홍술과 의성전투에서 전사한 홍술을 동일인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를 신뢰한다면, 홍술이 진보성 성주의 자격으로 아들 왕립을 왕건에게 보낸 924년 11월에서 928년 7월 의성전투에서 전사하기 전까지의 어느 시점에서 진보에서 의성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고 볼 수 있다.

그 사이 홍술의 활동이 자료상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옮겨간 시기와 경위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홍술이 의성부로 옮겼다는 것은 의성 지역이 뚜렷한 지방 세력이 없이 고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며, 후백제와의 쟁패에 있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의성 지역을 관리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홍술의 이주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왕건이 다른 신료가 있음에도 홍술을 의성에 보낸 것은 진보와 의성이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측면 및 진보의 병력 지원이 용이하다는 측면과 더불어 홍술에 대한 인간적 신뢰와 능력을 높이 산 것으로 여겨진다.

[왕건을 통곡케 하다]

진보성주로서 의성으로 옮겨 온 홍술이 928년의 의성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 했다. 『고려사절요』의 계속된 기록에 따르면, 홍술의 전사 소식을 접한 왕건이 “나의 좌우수를 잃었다”고 하며 ‘곡지통(哭之慟)’, 즉 통곡을 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그리고 이 시기를 언급한 여러 금석문 자료를 살펴보더라도 왕건이 통곡하였다는 표현은 이 의성전투 외에는 없을 것이다. 이는 그 전해에 대구의 공산전투(公山戰鬪)에서 패하였고, 지리적으로 중요한 의성을 점령당하였다는 상실감이 작용하였을 수도 있으나, 왕건이 얼마나 홍술을 신뢰하고 그 능력을 높이 평가했는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의성의 성황신으로 거듭난 홍술]

『의성읍지』에 실린 의성현 지도에 상천면과 남부면 사이의 야산에 있는 성황사(城隍祠)의 모습이 전하고 있다. 성황사와 홍술과의 관계 설정과 관련하여 대체로 세 가지의 기록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의성현 사묘조에 ‘속전(俗傳)’임을 전제하면서 김홍술을 성황사에서 제사지내고 있다는 표현이며, 둘째는 김이곤(金履坤)[1712~1774]이 저술한 「고려 김장군 순절비(高麗金將軍殉節碑)」에 나오는 내용으로 “처음에 장군의 사당을 성황신과 함께 제사하였는데, 1706년(숙종 32)에 고을 사람인 생원 김석겸(金錫兼) 등이 장군을 성황신과 함께 제사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 하여 마침내 나무로 신주(神主)를 만들고 조두(俎豆)로 제사하여 충렬사(忠烈祠)라고 써서 내걸었다.”라는 표현이며, 셋째는 『의성읍지』 사묘조에 인용된 유호인(兪好仁)[1445~1494]이 지은 「성황제 영송신가(城隍祭迎送神歌)」의 서(叙)에서 이야기하는 “속전에 대체로 성황신은 홍술이다”라는 표현이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의성읍지』에는 홍술을 성황신으로 모신 것으로 이해한 반면, 김이곤의 「고려 김장군 순절비」에는 성황신을 모신 ‘성황사’와 구분하여 홍술을 모신 사당을 ‘충렬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의성에 있던 기존의 성황신을 지역 주민들은 의성을 지키다 전사한 홍술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비록 홍술은 전사하였지만 그의 죽음이 남긴 가치는 오랫동안 의성 주민의 마음속에 신격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선필은 누구?]

선필홍술과 달리 진안 지역의 토착 세력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922년(고려 태조 5)에 건립된 풍기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豐基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碑)에 새겨진 글이다. 즉, 가지산파(迦智山派) 도의(道義)[?~825]의 제자인 진공대사[855~937]의 단월(檀越)[중이나 절에 물품을 베풀어주는 사람]로 ‘국부(國父) 최선필(崔善弼)’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국부’란 표현은 선필이 고려에 귀부하였을 때 왕건이 그를 ‘상보[尙父]’로 삼은 것과 관련한 표현이며, 중요한 것은 그의 성이 최씨라는 것이다. 이기백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최씨는 신라 6부의 성씨 가운데 하나로 6두품에 대응되고 있다. 그렇다면 선필은 6두품으로서 중앙에서 진안현에 파견된 지방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신라 말의 혼란기에 지방관이 재지세력(在地勢力)과 연합하여 그 지역의 안돈과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성주·장군으로 변모하였을 것이다.

[신라통(新羅通) 선필]

홍술이 『고려사』 열전에 등장하지 않은 것은 의문이나, 선필의 경우 왕순식 열전에 부기(附記)되어 있다. 그 내용 중에 “태조는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선필은 태조의 위덕(威德)을 보고 귀순하였다. 정성스런 계책으로서 신라와 통호케 하였으며” 라고 적혀 있다. 또한 931년(고려 태조 14) 왕건이 신라왕의 요청에 응하여 신라를 방문하였을 때도 선필을 먼저 보내어 신라왕의 안부를 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선필의 활동은 신라통이라 불릴 만큼 고려의 대신라(對新羅) 가교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활동의 근저에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선필이 신라에서 진안현에 파견된 지방관이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진보 지역의 향리 출신인 홍술이 고려에 귀부하였을 때도 여전히 신라에 의리를 지키다가 안동의 고창전투에서 후백제가 대패함을 계기로 뒤늦게 고려에 귀부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열전에서는 적을 막는 데 여러 차례 공이 있었고, 그 후에 귀부하였다고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이미 귀부 이전에 고려나 청송 지역에 도움이 되는 많은 공을 세웠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청송, 보성부가 되다]

홍술의 의성부 전출 후, 진보현 또한 진안에 있던 재암성 성주 선필이 관할하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특히 929년(태조 12)년 홍술이 의성전투에서 전사하고, 다음 해 선필이 귀부해 오고, 또 그 다음 해 신라와의 통교에 공을 세운 측면과 관련하여 진보와 진안 두 지역을 합친 청송 지역은 보성부의 성립을 보게 되는데, 이는 이 두 지역의 통합 여건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음이 전제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앞서 언급하였듯이 『고려사』 지리지에서 보성부재암성이라고도 했다는 표현이다. 홍술이 의성으로 옮겨 전사한 후 진보 지역은 인근 진안 지역의 재암성 성주인 선필이 관할하였을 것이며, 앞서 홍술의 활약은 물론 선필의 고려에 대한 적극적 협조는 보성부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미 진보와 진안 지역을 통할하였던 선필의 역할과 관련해 보성부재암성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조건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의성에서 전사하여 왕건을 통곡하게 한 홍술의 충절과, 왕건으로부터 상보로 칭해지며 신라와 고려의 가교 역할을 한 선필, 이 두 호족의 혁혁한 활동과 이들에 의탁했던 청송 지역민들의 애향은 결국 청송 지역이 보성부로 승격되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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