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873
한자 牟沖伊
영어공식명칭 Mo Chungi
이칭/별칭 모준이(牟俊伊)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3년 4월 4일연표보기 - 모충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3월 - 모충이 정용기의 산남의진 입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3월 - 모충이 최세윤의 산남의진에서 군수금 모집
활동 시기/일시 1908년 8월 3일 - 모충이 밀정 정말범 처단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모충이 투옥
몰년 시기/일시 1960년연표보기 - 모충이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모충이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오두동 -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 지도보기
활동지 경상북도 청송군
활동지 경상북도 영천군 - 경상북도 영천시
활동지 경상북도 청하군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성격 의병
성별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개설]

모충이(牟沖伊)[1883~1960]는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에 이어 대장 정환직(鄭煥直)마저 순국하자 1908년 3월 청송 보현산(普賢山)으로 들어가 최세윤(崔世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활동하였다.

[가계]

본관은 함평(咸平), 이명은 모준이(牟俊伊). 1883년 4월 4일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모충이는 1905년 일제의 을사늑약 강제 체결에 분개하여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에서 일어난 정용기의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활동하였다. 모충이는 1907년 10월 포항시 죽장면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본영의 핵심 장령(將領)들과 함께 정용기 대장이 전사하자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정환직을 따랐다. 하지만 그해 12월 정환직 대장마저 일본군에 잡혀 피살, 순국하였다.

모충이는 의진이 구심점을 잃게 되자 각지를 돌며 재기를 위한 군자금 모금 활동과 함께 친일 세력 처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6월 박신재(朴新材)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경상북도 청하군 세목동 동장 집에 들어가 군수금 20원을 징수하였으며, 그해 8월 3일에는 밀정으로 활동하던 청하군청 소사 정말범(鄭末凡)을 처단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일본군 수비대에게 탐지되어 경상북도 영일군 관학산(冠鶴山)에서 붙잡혔다.

모충이는 1908년 9월 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암살 및 강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1908년 9월 29일 대구공소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자 다시 상고하였다. 10월 20일 대심원에서 원심 확정 판결로 옥고를 치르던 중, 1912년 징역 12년으로 감형되었다가 1916년 다시 징역 9년으로 감형되면서 풀려났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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