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845
한자 李石伊
영어공식명칭 Lee Seogi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9년연표보기 - 이석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3월 - 이석이 정용기의 산남의진에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이석이 입암전투 후 독자적 의병 인솔
활동 시기/일시 1909년 - 이석이 일본군에 체포
몰년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이석이 교수형으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이석이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오두산동 -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 지도보기
활동지 경상북도 청송군
활동지 경상북도 흥해군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활동지 경상북도 청하군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장.

[개설]

이석이(李石伊)[1879~1910]는 1906년 3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산남의진의 정용기(鄭鏞基) 대장이 전사하자 독자적으로 의병을 이끌고 일본인 및 친일파 처단과 군자금 징수 활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1910년 3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가계]

1910년 당시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활동 사항]

이석이는 1906년 경상북도 영천군 자양면 검단동에서 정용기가 산남의진을 일으키자 이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그 뒤 1907년 10월 포항시 죽장면에서 벌어진 입암전투(笠巖戰鬪)에서 대장 정용기를 비롯한 핵심 장령들이 다수 전사하였다.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달려와 남은 병사들을 수습하여 의진을 이끌었으나, 이석이는 독자적으로 의진을 결성하여 이끌었다.

1907년 10월 이석이는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흥해읍의 일본인 우편국장과 그의 가족을 처단하고 무기와 군자금 600원을 압수하였다. 또 같은 해 12월 손수용(孫秀用) 이하 의병 16명을 이끌고 청하군 죽남면 부호들의 집에 들어가 다량의 군수금을 확보하였다. 1908년 1월 김선일(金善日)과 함께 병사 수십 명을 이끌고 장기읍분파소(長鬐邑分派所)를 공격하여 한인 순사 1명을 처단하고 무기를 확보한 뒤 분파소를 불태웠다. 같은 해 3월 21일 부하들을 시켜 일본군의 밀정 이명갑(李明甲)을 처단하였다. 1909년 5월 병사 10명을 이끌고 청송군 부내면 홍종우(洪鍾禹)의 집에서 군자금 36원과 소 한 필을 징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잡혀 살인·강도·방화 혐의로 1909년 10월 대구지방재판소에서 교형(絞刑)을 선고받았고,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 이어 고등법원에서 1910년 3월 4일 형이 확정되어 사형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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