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841
한자 李起白
영어공식명칭 Lee Gibae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9년연표보기 - 이기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이기백 흠치교 입교
활동 시기/일시 1921년 2월 - 이기백 8인조 활동 중 피체
몰년 시기/일시 1971년연표보기 - 이기백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9년연표보기 - 이기백 대통령 표창 추서
출생지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
활동지 경상북도 청송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흠치교 8인조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기백(李起白)[1899~1971]은 1920년 음력 7월 흠치교(吽哆敎)에 입교하여 독립자금 모집과 교세 확장에 노력하다 잡혔으나 1921년 11월 대구복심법원의 면소(免訴) 판결로 풀려났다.

[활동 사항]

이기백은 1920년 음력 7월 청송 본가에서 치성(致誠)을 하고 흠치교에 들어갔다. 흠치교의 본부는 전라북도 정읍에 있었고, 교주(敎主)는 차경석(車京錫)이었다. 조직은 교주 아래 60방위[고문]가 있고, 60방위 각자는 6인조를 두고, 6인조는 각자 12인조를, 12인조는 각자 8인조를, 8인조는 각자 15인조를 두도록 되어 있었다. 이기백은 8인조였고 그 아래 15인조의 조직에 착수하여 이도룡(李道龍) 등 9명에게 입교 권유를 하였다.

이기백은 상위자에게 선전받은 대로, 열심히 정도(精道)하면 둔신술(遁身術)을 알게 되어 총검도 피할 수가 있기 때문에 흠치교의 힘으로 함께 일어나면, 1924년 갑자년에는 한국이 독립을 할 것이라고 선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입교를 권유하였다. 흠치교의 참된 목적은 한국의 독립에 있고, 이를 위해 종교를 표방하여 널리 교도를 모으고 독립자금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이기백은 이러한 활동 중 1921년 2월경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2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그러나 1921년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921년 2월 8일부터 4월 18일 사이 즉결 처분에 의한 구류형으로 이미 형 집행이 종결되었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면소(免訴) 처분으로 신철희(申喆熙)·조용원(趙鏞元) 등과 함께 풀려났다.

[상훈과 추모]

2009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공훈록』18(국가보훈처, 2010)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1921. 6. 27.)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21.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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