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838
한자 尹楨禹
영어공식명칭 Yoon Jeongu
이칭/별칭 무일(無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8년연표보기 - 윤정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6년 3월 - 윤정우 청송의진 전방장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02년 04월 08일연표보기 - 윤정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9년연표보기 - 윤정우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라리 604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라리 604
활동지 청송의진 - 경상북도 청송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청송의진 서기|전방장

[정의]

개항기 청송출신의 의병장.

[개설]

윤정우(尹楨禹)[1848~1902]는 1896년 3월 청송의진(靑松義陣)에 참여하여 서기(書記) 및 전방장(前防將)으로 활동하였다.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무일(無逸). 1848년 경북 청송군 부동면[현 주왕산면] 라리 604에서 아버지 윤태영(尹泰永)과 어머니 구산박씨(龜山朴氏)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추증되었다.

[활동 사항]

윤정우는 1896년 3월 창의한 청송의진에 참여하였다. 3월 16일 청송의진이 창의장(倡義將) 심성지(沈誠之)를 비롯하여 부장(副將) 조성박(趙性璞), 중군장(中軍將) 김대락(金大洛), 좌익장(左翼將) 김상길(金相吉), 우익장(右翼將) 남두희(南斗凞), 사병도총(司兵都摠) 남승철(南昇喆),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 서효원(徐孝源) 등을 추대하여 진용을 갖출 때, 윤정우는 서기로 선임되었다. 그 뒤 4월 6일과 4월 29일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지휘부를 편제하고 진용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전방장에 임명되었다.

청송의진은 창의 이후 청송읍에 주둔하다가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4월 27일 청운(靑雲)으로 의병소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포정(砲丁) 100여 명이 강 건너 백사장에 모여 의거를 따를 수 없다면서 농성하였다. 왜냐하면 청송의진이 창의 초에 군인의 군료를 1냥 5전으로 책정하였다가 1냥으로 삭감하여 지급하였기 때문이다. 청송의진은 군문집사(軍門執事) 박봉의(朴鳳儀)를 보내 설득하였으나 도리어 청운에 머무르고 있는 집사를 총으로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전방장을 맡고 있던 윤정우는 소모장(召募將) 심능장(沈能璋)과 함께 각 영의 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십초장(十哨長) 윤동섭(尹東燮)을 총영(摠營)으로 나포해 칼을 씌워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5월 9일 윤정우는 사병도총 남승철·선봉(先鋒) 홍병태(洪秉泰) 등과 함께 포정 4초(哨)를 거느리고 군사를 소모하기 위해 흥해(興海)에 파견되어 흥해출진소(興海出陣所)에서 활동하였다.

5월 24일 청송의진은 국왕 고종의 해산 칙유문(勅諭文)을 받고, 5월 25일 청송군 관내 8개면으로 분진(分陣)하여 면군체제(面軍體制)로 전환하였다. 그 후 청송의진은 경주연합의진(慶州聯合義陣)의 결성에 참여하여 경주성전투(慶州城戰鬪)를 벌였으며, 영덕연합의진(盈德聯合義陣)의 결성에 참여하여 영덕전투(盈德戰鬪)를 벌이는 등 8월경까지 활동하였다. 윤정우청송의진 해산 이후 은거하다가 1902년 4월 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9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08 행정지명 현행화 부동면 -> 부동면[현 주왕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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