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836
한자 尹成澤
영어공식명칭 Yoon Seongtaek
이칭/별칭 이등정웅(伊藤政雄)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이현리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김영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6년 05월 02일연표보기 - 윤성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44년 6월 14일 - 윤성택 피체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45년 9월 27일 - 윤성택 출옥
몰년 시기/일시 1957년 01월 01일연표보기 - 윤성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6년연표보기 - 윤성택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윤성택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44년 - 교토 시마무라 토공회사 조선인 항일사건 발생
출생지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이현리 170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일본 교토부 미즈도다니
활동지 시마무라 토공회사 - 일본 교토부 철희군 전변정 자외도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윤성택(尹成澤)[1926~1957]은 16세 때인 1941년 6월부터 일본 교토[京都]의 토목공사장에서 일하던 중 동포 공원(工員)인 동지들과 함께 만 3년 동안 독립운동을 은밀히 벌이면서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준비하다 체포되어 1여년 간 옥고를 치렀다.

[가계]

1926년 5월 2일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이현동(泥峴洞) 170번지에서 태어나 10대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이등정웅(伊藤政雄)으로 창씨개명하였다.

[활동 사항]

1941년 교토부[京都府] 철희군(綴喜郡) 전변정(田邊町) 자외도(字外島) 소재 시마무라 토공회사[島村土工會社]에 미장공으로 취업해 일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인들의 차별 대우와 상시적 모욕 언동에 격분하여, 동년 6월 직장 동료인 경상북도 칠곡 출신의 전경원(全京元)[1923년생]과 항일 활동을 벌일 것을 협의하고, 달성 출신인 김말도(金末度)[1924년생], 경상남도 통영 출신인 김석원(金碩元)[1924년생], 칠곡 출신인 이상문(李相文)[1926년생]을 동지로 포섭하였다. 그들은 합의하기를, “우리는 취직은 물론 모든 점에서 차별·억압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자유는 제한되었고, 조선 내의 식량 사정은 일본에 비해 극히 궁핍함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런 악조건에서 벗어나려면 민족 해방과 독립국가 건설밖에는 다른 길이 없으므로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위하여 활용하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9월부터 교토부 여사군(與謝郡) 산전촌(山田村) 소재 미륵신사(彌力神社) 경내와 윤성택의 주소지인 미즈도다니[水戶谷] 등지에서 여러 번 같이 모여, 상호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고양시켰다. 그들이 생각해낸 독립운동 방법은 징병 제도 반대, 만약 입대하면 후배를 지도 계몽해서 독립의식 양성, 만약 전선에 참가하면 적 측으로 도피 또는 통모하여 이적 행위 감행, 항공병을 지원하여 일본군 기지에 폭격 감행, 경찰관이 될 수 있다면 다수의 동포 청년을 끌어들여 대대적인 독립운동 전개 등이었다. 전쟁의 장기화로 피폐해진 일본 국내 사정을 이용하여 민중봉기를 유발할 것도 계획하였다.

그러다 1944년 6월 초에 토공 숙소에 대한 경찰의 일제 검색이 있었는데, 그 와중에 전경원의 일기장에서 민족의식이 농후한 언사의 낙서들이 발견되어 내사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위와 같은 활동을 해왔음이 드러나 6월 14일에 다른 동지 3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해 11월 10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교토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일제의 패전 항복 후인 1945년 9월 20일에 예심 종결과 더불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9월 27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 형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일제 경찰과 검사국에서 받았던 극심한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57년 1월 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6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서훈이 승격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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