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819
한자 沈灌之
영어공식명칭 Shim Kwanji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34년연표보기 - 심관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6년 3월 - 심관지 청송의진 활동
몰년 시기/일시 1899년 5월 18일연표보기 - 심관지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심관지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복리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복리 101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복리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복리 101
활동지 청송의진 - 경상북도 청송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청송의진 백의종사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장.

[개설]

심관지(沈灌之)[1834~1899]는 1896년 3월 창의(倡義)한 청송의진(靑松義陣)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서효원(徐孝源)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가계]

본관은 청송(靑松). 1834년 청송군 현서면 복리[지금의 안덕면 복리] 101에서 태어났다. 고려 후기 충혜왕(忠惠王) 때 전리판서(典理判書) 악은(岳隱) 심덕부(沈德符)의 6세손으로 조선 단종 때 경상도 산청(山淸)에서 입향한 월헌(月軒) 심손(沈遜)의 후예이다.

[활동 사항]

심관지는 1896년 3월 16일 창의한 청송의진의 결성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896년 1월 안동의진(安東義陣)과 예안의진(禮安義陣)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이 청송 지역에 전해졌고, 곧이어 국왕 고종의 애통조(哀痛詔)와 주변 각 지역의 의병진에서 발송한 통문(通文)과 격문(檄文)이 날아들었다. 3월 2일에는 안동의진의 안동부(安東府) 점령과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의 도망 등에 관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며, 청송군수 남유희(南有熙) 역시 도망간 상태였다. 3월 9일 안동의진의 소모장(召募將) 유시연(柳時淵)이 청송군 관아의 무기고를 열고 병기를 탈취하는 한편, 격문을 발송하여 창의하지 않는 이유를 추궁하는 등 겁박하였다. 이에 심관지청송향교(靑松鄕校) 향원(鄕員)들과 함께 창의를 주도하였다.

심관지는 3월 10일 청송향교의 향원 100여 명이 모인 향회(鄕會)에서 서효원 등과 함께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내걸고 창의를 추진하였다. 3월 11일 청송향교의 향원들을 비롯한 군중들이 대장을 천거하도록 간청하였다. 이에 심관지서효원과 함께 “귀중한 것은 모두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일이라도 물어서 도모하라 했는데, 하물며 이와 같은 큰 거사에 있어서 가벼이 행할 수 있으리오.”하며 신중하게 결정하자며 사람들을 설득하였다.

3월 12일 심관지청송향교에서 향원 200여 명과 함께 향회를 개최하여 창의를 결의하고, 이날 오후 객사(客舍)에서 심성지(沈誠之)를 창의장(倡義將)으로 추대하였다. 3월 15일 부장(副將) 조성박(趙性璞), 우익장(右翼將) 권성하(權成夏), 좌익장(左翼將) 김상길(金相吉)을 내정하고 참모(參謀)와 서기(書記) 이하를 선발하였으며, 3월 16일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창의하였다.

3월 17일 심관지권탁수(權鐸洙), 서효원(徐孝源), 민성호(閔晟鎬), 이중성(李中性), 조성눌(趙性訥) 등과 함께 6인의 백의종사(白衣從事)에 차출되어 천신과 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날 서효원이 축문(祝文)을 지어 축원하였으며, 김상길은 창서사(唱誓辭)를 낭독하였다. 3월 22일 청송의진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中軍將),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 서효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였으며, 3월 23일에는 남승철(南昇喆)을 사병도총(司兵都摠), 3월 24일에는 김진만(金鎭萬)을 모량도감(募粮都監)에 임명함으로써 의병진은 차츰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1899년 5월 1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5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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