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778
한자 金達熙
영어공식명칭 Kim Dalhui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0년연표보기 - 김달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김달희 흠치교 입교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김달희 독립자금 납부 및 징수
몰년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김달희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6년연표보기 - 김달희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파천면 모질길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황목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파천면 모질길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황목리 지도보기
활동지 경상북도 청송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흠치교 8인조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달희(金達熙)[1890~1977]는 1920년 음력 8월 경상북도 청송에서 흠치교(吽哆敎) 8인조에 입교하여 교세 확장과 독립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다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김달희는 1920년 음력 8월 청송 본가에서 치성(致誠)을 올리고 흠치교(吽哆敎) 8인조에 입교하였다. 흠치교는 전라북도 정읍에 본부를 두었으며, 교주는 차경석(車京錫)이었다. 조직은 교주 아래 60방위를 두었는데, 60방위는 60명의 고문으로 그 아래 각자 6인조를, 6인조는 그 아래 각자 12인조를, 12인조는 그 아래 각자 8인조를, 8인조는 그 아래 각자 15인조를 두도록 하였다. 이 조직이 완성되면 교도 수가 수백만에 이르게 되어 흠치교의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김달희는 8인조에 가입하여 치성비(致誠費) 10원을 납부하고 하위 조직으로 15인조를 구성하여 조원들에게 각각 치성비를 징수하였다. 치성비는 치성, 곧 흠치교 수칙에 따라 교도가 될 때 각자 거주하는 곳에서 닭의 생피 또는 산수(山水)를 마시고, ‘옥황상제 하감(下鑑)의 전(前)’이라고 종이에 적어 제사하고 상위 사람에게 맹세하는 의식을 올리는데, 이때 출자하는 비용이다. 치성비는 6인조는 30원, 12인조는 15원, 8인조는 10원, 15인조는 5원을 납부하여 그 일부는 제사 비용에 충당하고, 나머지는 본부로 보내 독립운동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흠치교는 표면적으로는 종교를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국권회복운동을 목적으로 하였다. 김달희는 하위 15인조 조원들에게 자신이 상위 사람에게 선전받은 대로, 1924년 갑자년에 세상이 통일되며 교주 차경석이 계룡산에 도읍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한국은 독립된다고 선전하였다. 김달희는 흠치교를 확장하면 흠치교 세상이 되어 흠치교의 힘으로 한국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조원들에게 권유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1921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공소하였다가 그해 7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취하로 원심대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0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공훈록』17(국가보훈처, 2009)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21. 4. 22.)
  • 「형사사건부」(대구복심법원, 1921.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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