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효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662
한자 權孝良
영어공식명칭 kwon Hyoryang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26~1435년 사이 - 권효량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38년 - 권효량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42년 - 권효량 승정원주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49년 - 권효량 병조정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50년 9월 10일 - 권효량 사헌부지평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50년 - 권효량 사간원우헌납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52년 2월 - 권효량 이조정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52년 11월 - 권효량 경상도점마별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55년 - 권효량 부정 임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55년 12월 - 권효량 좌익원종공신 2등 녹훈
출생지 문거리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문거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한양 - 서울특별시
외가|처가 성주목 - 경상북도 성주군
외가|처가 한양 - 서울특별시
부임|활동지 거제도 - 경상남도 거제시
부임|활동지 충주목 - 충청북도 충주시
묘소|단소 각심사 뒤편 유좌 -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안동
대표 관직 예문관직제학

[정의]

조선 전기 청송 출신의 문신.

[개설]

권효량(權孝良)[?~?]은 세종 대에 관직에 나아가 집현전학사와 의정부사인을 거쳐, 예문관직제학을 역임하였던 조선 전기의 관료이다. 1438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로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하면서 청송에서 서울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이후 승정원주서, 병조정랑, 사헌부지평, 이조정랑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성균관사예와 실록 편찬기주관으로 『세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함으로써 학문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권효량은 세조가 등극하는 데 공을 세워서 좌익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가, 예문관직제학을 역임하였다.

[가계]

본관은 안동. 생몰년은 알 수 없다. 권효량의 집안은 원래 안동부(安東府) 동문(東門) 밖 용흥리(龍興里)에 세거(世居)해 왔으나, 할아버지인 권명리(權明利)가 1384년(고려 우왕 10년) 왜구의 침략을 피하여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안덕현(安德縣)으로 옮겨온 이래로 후손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아버지 권자용(權自庸)은 세종대 안음(安陰), 청하(淸河), 진보(眞寶) 등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어머니 숙인(淑人) 여강이씨(驪江李氏)는 현감 이성호(李成浩)의 딸로서, 외조부 이성호는 경주 양동마을에 처음 입향한 안강현감 이광호(李光浩)의 형이다. 숙부인 권자성(權自誠)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고, 예종 때 다대포만호(多大浦萬戶)를 역임하였다. 현재 안덕면 문거리에 세거하는 안동권씨권자성의 후손들이다.

권효량은 청송군 안덕현 문거리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그러나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종사하기 위해 서울로 옮겨가서 정착하였다. 권효량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현감 이후(李厚)의 딸인 숙부인(淑夫人) 성주이씨(星州李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한성부윤(漢城府尹) 김연지(金連枝)[1396~1471]의 딸인 원주김씨(原州金氏)이다.

아들은 어모장군(禦侮將軍) 권상(權祥)으로, 목사 이우(李友)의 딸인 성주이씨와 혼인하였다. 그 이후 권상이 외가(外家)이자, 처가(妻家)가 있는 성주로 옮겨가서 정착하면서 권효량의 후손들은 성주에 세거하게 되었다. 특히 권효량의 손자이자, 권상의 셋째 아들인 수암(水庵) 권희맹이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는 등 현달하였다. 또한 권희맹의 아들인 묵암(默庵) 권응정(權應挺)[1498~1564]과 지족당(知足堂) 권응창(權應昌)[1500~1568]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박사, 경연검토관 및 황해도 관찰사, 경주부윤, 경상도관찰사, 사은사(謝恩使), 동지중추부사 등의 내외의 고관 요직을 역임하면서,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활동 사항]

권효량은 1426~1435년 사이 생원시에 급제하고, 1438년(세종 20) 식년시 문과 병과에 3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집현전학사와 1442년(세종 24) 정7품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거쳐서 1449년(세종 31) 정5품 병조정랑에 임명되었다. 1450년(세종 32) 9월 10일에는 정5품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고, 이후 사간원우헌납(司諫院右獻納)을 겸직하였다. 1451년(문종 1) 1월에 왕명으로 경상도로 파견되어 성주목사 이백량(李伯良)을 추핵(推覈)하였으며, 1452년(문종 2) 2월에는 정5품 이조정랑으로서 충주에 파견되어 전세(田稅) 징수의 불법을 몰래 살펴서 보고하라는 왕명을 수행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 11월에는 사복시(司僕寺)의 점마별감(點馬別監)으로 임명되어, 경상도 거제도의 경작 가능한 땅을 조사하여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이후 정4품 통선랑 수 성균사예(通善郞守成均司藝)로 재직하면서, 1452~1454년까지 『세종실록』 편찬의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다. 정4품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거쳐서 종3품 부정(副正)으로 재직하던 1455년(세조 1) 12월 27일에는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그 이후 정3품 예문관직제학을 역임하였다.

[묘소]

한양의 동소문 밖 미아리(彌阿里)의 각심사(覺心寺)[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제2동 4통 일원] 뒤편 유좌(酉坐)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455년 12월 27일에 좌익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 사후에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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