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652
한자 孫昭
영어공식명칭 Son So
이칭/별칭 일장(日章),송재(松齋),계천군(鷄川君),양민공(襄敏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33년연표보기 - 손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53년 - 손소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53년 - 손소 진사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59년 - 손소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59년 - 손소 승문원정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59년 - 손소 승문원주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63년 - 손소 문예시 장원
활동 시기/일시 1463년 - 손소 성균주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63년 - 손소 사헌부감찰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63년 - 손소 병조좌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64년 - 손소 파직
활동 시기/일시 1464년 - 손소 겸예문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64년 - 손소 병조좌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64년 - 손소 종묘서령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67년 - 손소 이시애의 난 진압
활동 시기/일시 1467년 - 손소 적개공신 2등 녹훈
활동 시기/일시 1467년 - 손소 내섬시정 특진
활동 시기/일시 1469년 - 손소 성주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472년 - 손소 공조참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73년 - 손소 안동대도호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476년 - 손소 진주목사 부임
몰년 시기/일시 1484년연표보기 - 손소 사망
출생지 청송도호부 안덕현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문거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주부 양좌동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외가|처가 경주부 양좌동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부임|활동지 성주목 - 경상북도 성주군
부임|활동지 안동대도호부 - 경상북도 안동시
부임|활동지 진주목 - 경상북도 진주시
묘소|단소 달전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
성격 공신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 진주목사

[정의]

조선 전기 청송 출신으로 이시애의 난 때 공을 세운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 자는 일장(日章), 호는 송재(松齋), 군호(君號)는 계천군(鷄川君), 시호는 양민(襄敏). 아버지는 병조참의를 지낸 손사성(孫士晟), 어머니는 직장(直長)을 지낸 권명리(權明理)의 딸 증(贈) 정부인 안동권씨이며, 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손등(孫登), 증조할아버지는 검교중추원부사(檢校中樞院副使)를 지낸 손현검(孫玄儉)이다. 부인은 만호(萬戶)를 지낸 유복하(柳復河)의 딸 정부인(貞夫人) 풍덕유씨(豊德柳氏)이다.

[활동 사항]

손소(孫昭)[1433~1484]는 1433년(세종 15) 청송도호부 안덕현(安德縣) 본가[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문거리]에서 출생하였다. 김종직(金宗直)과 교유하였으며, 1453년(단종 1)에는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兩試)에 모두 급제하였다. 1457년(세조 3) 처가가 있는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으로 이주하였다.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올랐다. 1463년(세조 9) 문예시(文藝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였고, 성균주부(成均主簿)·사헌부감찰·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잇달아 임명되었다.

1464년(세조 10) 『의방유취(醫方類聚)』의 교정을 잘못 본 일로 파직되었으나, 얼마 후 겸예문관(兼藝文館)에 올랐다. 집현전이 혁파되어 문사(文士)를 장려할 방도가 없어졌기에 대신 젊은 문사를 뽑아 겸예문(兼藝文)으로 삼고 학문을 장려하였는데, 손소도 이때 선발되었다. 곧이어 병조좌랑과 종묘서령(宗廟署令)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467년 5월 함길도(咸吉道)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고, 이때 경차관(敬差官)으로 함길도에 파견되었던 손소의 형 손욱(孫旭)이 적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손소는 평로장군(平虜將軍) 박중손(朴仲孫)의 종사관이 되어 군무를 총괄하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에 적개공신 2등에 녹훈되었고, 노비와 전답 등을 하사받았다. 또한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특진하였다.

1469년(예종 1)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였는데, 흉년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잘 다스리는 등 치적이 있어 유임되었다. 1472년(성종 3)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계천군에 봉작되었다. 1473년(성종 4) 안동대도호부사, 1476년(성종 7)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는데, 이는 모두 어버이를 잘 모시기 위해 손소가 청한 외직이었다. 1480년(성종 11) 병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483년(성종 14) 관직에 임명되자 서장(書狀)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는데, 특별히 관록(官祿)을 지급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2권 1책의 『양민공문집(襄敏公文集)』이 전한다.

[묘소]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에 증직(贈職)되었고, ‘양민(襄敏)’을 증시(贈諡)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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