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432
영어공식명칭 Temple Site
이칭/별칭 사기(寺基),사지(寺址),폐사지(廢寺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집필자 박병선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지역에서 현재 폐사되고 그 흔적만 남은 사찰 터.

[개설]

청송 지역에서 현재 절터로 확인된 곳은 많지 않다. 조선시대 읍지류(邑誌類) 등에 사찰 이름을 남기고 폐사된 곳은 주방사(周房寺), 보현사(普賢寺), 쌍계사(雙溪寺), 쌍암사(雙巖寺), 진보현[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일대의 옛 행정 구역]의 삼성암(三聖庵), 명당리 가락사지(嘉樂寺址) 등이며, 사찰 이름도 없이 절터로만 전해지는 괴정리 사지, 월외리 사지, 문거리 사지, 개일리 사지, 도리 사지 등이 있다.

[절터의 발생 원인]

절터는 과거에 가르침과 수행, 그리고 기도의 공간인 사찰[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초석이나 유물만 남아 있는 곳으로, 사기(寺基), 사지(寺址), 폐사지(廢寺址)라 하기도 한다.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건립된 사찰이 폐사되어 절터만 남게 된 까닭은 조선의 건국으로 불교 사회에서 유교 사회로의 변화와 불교 억제 정책, 잦은 전쟁이나 화재, 홍수 등 자연재해 및 경제적 사정 등이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불교 억제 정책으로 승려가 되는 길을 막기 위해 도첩제(度牒制)를 강화하였고, 사찰이 소유한 토지를 몰수하였으며 나아가 많은 사찰을 정리하였다. 또한 승려들을 승군(僧軍)이나 승역(僧役)으로 차출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유생이나 관리들이 사찰을 유희나 휴게의 장소로 사용하면 그 비용을 사찰이 떠안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를 ‘빈대가 들끓었다’라는 표현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이유로 많은 사찰이 폐사되었다.

현재까지 조계종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파악한 전국의 절터의 숫자는 5,000여 곳이 훨씬 넘는다고 한다. 현재 청송군에 소재한 폐사지의 경우 폐사 사유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으며, 폐사된 사찰명이 전하는 것만 겨우 위치를 추정하고 있는 정도이다.

[절터의 기록]

청송 지역의 절터를 확인할 수 있는 문헌으로는 조선시대 읍지류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청송부읍지(靑松府邑誌)』,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영남읍지(嶺南邑誌)』 등과 1937년에 간행된 『청송군지(靑松郡誌)』『청기지(靑己誌)』 등이 있다. 그 외 18세기 말에 출판된 『범우고(梵宇攷)』와 1900년대 초반에 발간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청송 지역의 절터]

청송 지역에도 여러 사찰이 창건되고 폐사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읍지류와 1937년에 간행된 『청송군지』에 의하면 주방사, 보현사, 쌍계사, 쌍암사가 폐사되었으며, 1899년에 간행된 『경상북도진보군읍지(慶尙北道眞寶郡邑誌)』에 의하면 진보현의 삼성암이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절터가 있는데, 사찰 이름이 있는 명당리 가락사지를 비롯하여 사찰 이름이 없는 괴정리 사지, 월외리 사지, 문거리 사지, 개일리 사지, 도리 사지 등이 있다.

송생리 쌍암사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 ‘고적조(古蹟條)’에 송생현(松生縣)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이후의 기록이 전혀 없어서 알 수가 없다. 다만 마을 사람들이 쌍암사가 있던 곳을 ‘남산 절골’이라 부르는 것을 통해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명당리 가락사지는 기록은 전혀 없고 여기도 쌍암사와 마찬가지로 가락사가 있던 곳을 ‘가락골’, 혹은 ‘절터구미’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통해 여기에 절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송 지역의 절터는 대부분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곳에 있다. 진보면 괴정리 사지는 갈평저수지 끝자락 산기슭에 있어 자동차 접근이 어렵고 정확한 위치도 잘 모른다고 한다. 다만 ‘절골’이라고 부르고 있고, ‘빈대가 많아서 폐사되었다.’는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곳에 절터가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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