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경찰서습격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63
한자 靑松警察署襲擊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9년 04월 13일연표보기 - 청송경찰서습격사건 발생
발생|시작 장소 청송경찰서 -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좌익 무장 유격대[빨치산]

[정의]

1949년 4월 13일 좌익 무장 유격대가 경상북도 청송군의 청송경찰서를 습격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45년 광복 이후 청송 지역에서 활동하던 좌익 세력은 1946년 ‘10월 사건’ 이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산으로 거점을 옮겨 무장 유격 활동을 벌였다. 1947년 8월 무렵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아무런 성과 없이 휴회에 들어가자, 그해 9월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고,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는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한국에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선거를 감독하기 위해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파견되었으나 북한과 소련은 유엔의 결정에 반발하여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였다. 결국 1948년 2월 유엔은 소총회를 열어 선거가 가능한 지역, 즉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좌익 세력은 선거를 무산시키고 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무장 유격 활동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5월 10일 총선거는 예정대로 시행되었으며, 청송 지역에서도 3명의 국회의원 후보가 출마한 가운데 교육협회 소속의 김봉조(金鳳祚)가 당선되었다. 5.10총선거로 구성된 임기 2년의 제헌국회는 헌법을 비롯한 정부 수립을 뒷받침하는 여러 법을 제정했으며,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전국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좌익 무장 유격대[빨치산]의 활동이 강화되었다. 청송 지역에서도 보현산(普賢山)[1,124m]과 주왕산(周王山)[720.6m] 등을 중심으로 좌익 무장 유격대의 활동이 강화되었다.

[경과]

1948년 미군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앞두고 무장 유격대를 포함한 좌익 세력의 진압에 들어갔다. 청송 지역에서도 1948년 6월 경찰이 좌익 무장 유격대가 보현산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무장 경찰을 동원하여 좌익 무장 유격대를 공격하였다. 이 작전을 계기로 청송 지역에서는 일시적으로 좌익 무장 유격대의 활동이 약화되었다.

1948년 10월 전라남도 여수와 순천 등지에서 군인이 반란을 일으키자[여수.순천 10.19사건] 영남에 주둔하던 국군이 호남과 경상남도 지역으로 집중 투입되었다. 북한은 이를 좌익 무장 유격대가 활동할 수 있는 호기로 판단하고 그해 11월부터 인민유격대를 대거 남파하였다.

1949년 1월에는 경상북도 영일군 오천(烏川)[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오천읍]에 주둔하던 국군 6연대 오천파견대가 지역 유격대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킨 후 청송 지역 좌익 무장 유격대와 합류하였다[국군 6연대 3차 반란사건]. 좌익 무장 유격대는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거나 활동 상황을 경찰과 군에 보고하는 관공리를 보복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고, 그때마다 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진압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좌익 무장 유격대는 진압에 대한 보복과 공권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청송경찰서를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실행에 앞서 좌익 무장 유격대는 행상인으로 가장하여 청송면에 잠입하여 청송경찰서 위치와 경비 상황, 순찰 노선과 순찰 시간 등을 정탐하였다. 1949년 4월 13일 새벽 좌익 무장 유격대는 청송경찰서와 시장 등지에 잠입하여 경찰의 퇴로를 봉쇄하고 경찰서 뒷편에 위치한 방광산(放光山)[518.7m]에 공격대를 배치하였다.

[결과]

경찰은 좌익 무장 유격대가 청송경찰서를 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모든 경찰관과 민보단 단원을 비상 소집하여 대비하고 있었다. 1949년 4월 13일 경찰이 좌익 무장 유격대의 공격 징후를 포착하고 대비하고 있을 때 좌익 무장 유격대가 청송경찰서 서장 관사에 화염병을 투척하며 습격해왔다. 경찰과 좌익 무장 유격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지만, 경찰은 철저한 대비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고, 좌익 무장 유격대는 산으로 도주하였다. 경찰은 방광산 방면과 달기약수탕 방면으로 추격전을 펼쳐 좌익 무장 유격대 대원 1명과 무기 등을 압수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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