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21
한자 近代
영어공식명칭 Modern Era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경상북도 청송 지역의 역사.

[개설]

경상북도 청송 지역은 1894년(고종 31) 7월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청송과 진보가 모두 군(郡)이 되어 안동부(安東府)에 속하였다. 1896년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道)로 개편됨에 따라 경상북도 청송군과 진보군이 되었다. 1911년 동리(洞里) 통폐합에 이어 1914년 부군면(府郡面) 통폐합이 시행되었다.

1914년 3월 1일 시행된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도 통폐합과 함께 지명 개칭도 이루어졌다. 청송군에서는 부내면(府內面), 부동면(府東面)[현 주왕산면], 부남면(府南面), 현동면(縣東面)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반면 현남면(縣南面)과 현서면(縣西面)현서면으로, 현북면(縣北面)과 현내면(縣內面)은 안덕면(安德面)으로, 부서면(府西面)과 진보군 남면(南面)은 파천면(巴川面)으로 통합되었다. 이때 진보군이 폐지되었고, 진보군의 상리면(上里面), 하리면(下里面), 서면(西面)은 진보면(眞寶面)으로 폐합되어 청송군에 편입되었다. 청송군의 부내면은 청송면(靑松面)[지금의 청송읍]으로 개칭되었다. 이리하여 청송군은 8개 면으로 통폐합되었다.

청송 지역은 경상북도에서도 비교적 산간 지대에 속한 오지였으므로 전국적인 정치적 사건이나 학생운동, 여성운동,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사회운동으로부터 소외된 지역이었다. 또한 민족운동에 있어서도 주요한 전국적인 사건에 관련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한제국기 국권회복운동]

개항기 및 대한제국기(大韓帝國期)의 국권회복운동은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제1차 의병전쟁[1895~1896] 시기에는 1896년 3월 청송의진(靑松義陣)과 1896년 4월 진보의진(眞寶義陣)이 각각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제2차 의병전쟁[1905~1910] 시기에는 1906년 3월 영천 지역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자 많은 인사들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1908년 산남의진의 지역 부대로 서종락(徐鍾洛)이 이끄는 청송동부진(靑松東部陣)남석구(南錫球)가 이끄는 청송서부진(靑松西部陣)이 활동하였다.

한편, 청송 지역에서는 계몽운동 단체의 결성은 없었다. 서울에서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대한국민교육회]가 결성된 이래 1906년 5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1907년 11월 대한협회(大韓協會), 1908년 3월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와 같은 계몽운동 단체가 결성되어 지회(支會)가 각처에서 결성되었으나 청송 지역에서는 그런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의 일환으로 1909년 4월 청송에 낙일학교(樂一學校), 1908년 진보에 광덕학교(廣德學校)가 설립되었을 뿐이다.

[1910년대 ‘무단폭압정치’ 하의 독립운동]

1910년대 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청송 지역은 진보 출신의 권영만(權寧萬)이 참여하였다. 권영만은 영양군 일월면에서 출생하였지만, 일찍부터 진보향교(眞寶鄕校)를 출입하고 있었다. 권영만은 1922년경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로 이주하였고, 박상진(朴尙鎭)이 총사령(總司令)이었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청송 지역 인사로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로는 박영산(朴榮山)과 남우락(南禹洛) 등이 있다.

[3.1운동]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청송 지역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5일 진보면 진안리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필두로 3월 26일과 27일 두 차례의 현서면 구산리 화목장터 만세시위운동, 그리고 3월 21일과 3월 25일, 4월 6일 청송면 만세시위운동이 각각 전개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청송 지역의 만세시위는 기독교인과 양반 유림(儒林)들이 주도하였으며, 청송 지역의 유력한 가문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이다.

[1920년대 소위 ‘문화정치’ 하의 독립운동]

1919년 3.1운동 이후 청송 지역의 독립운동은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활동한 권영만, 조선규(趙善奎), 김영우(金永佑) 등의 활동이 주목된다. 그중 대한광복회 회원이었던 권영만은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에 참여하였고, 1920년 국내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주비단(籌備團)의 군자금 모집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2월 결성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의 군자금 모집 과정에서 조정식(趙貞植), 조규한(趙圭漢), 황보훈(皇甫薰), 심호택(沈琥澤) 등의 부호들이 사령서(司令書)를 받았다. 그리고 청송군 청송읍 금곡동(金谷洞) 출신 윤자영(尹滋瑛)의 활동이 눈에 띈다. 서울에서의 3.1운동 참여와 1920년 청년운동 참여, 1922년 11월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상해파 대표로 베르흐녜우딘스크 통합회의 참석,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참여, 1924년 1월 의열단원(義烈團員)인 김지섭(金祉燮)의 ‘니주바시투탄의거[二重橋投彈義擧]’ 지원, 1924년 5월 상해청년동맹(上海靑年同盟) 결성, 1926년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만주총국(滿洲總局) 결성 주도 등이다.

그 외 청송 출신의 심상완(沈相完)이 1922년 상해에서 조직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던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 시사책진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했던 안창호(安昌浩) 등이 주도하였으며, 독립운동전선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하지만 1922년 8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청송 지역에서 전개된 사회운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청년운동으로 1925년 청송청년회(靑松靑年會)와 1926년 6월 진보청년회(眞寶靑年會), 그리고 1926년 12월 청송기독청년회(靑松基督靑年會) 활동이 있었다. 여성운동으로 1927년 청송여자청년회(靑松女子靑年會), 노동운동으로 1925년 청송노동공제회(靑松勞動共濟會), 형평운동(衡平運動)으로 청송형평분사(靑松衡平分社) 활동이 있었다. 그리고 1925년 협동조합운동(協同組合運動) 관련 청송군 부남면 식산조합(殖產組合) 등이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나, 그 활동은 거의 드러나고 있지 않다.

[1930년대 이후 ‘병참기지’ 하의 독립운동]

1920년대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윤자영은 1928년 말 다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 윤자영은 1929년 2월 하순 지린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 향수하자(香水河子)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1930년 조선공산당 국내 공작책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조직부 책임을 맡아 함경남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31년 5월 다시 만주로 들어가 1931년 6월부터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滿洲省委員會) 동만주특별위원회(東滿洲特別委員會) 선전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윤자영은 1932년 러시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 입학한 후 1934년 스탈린의 대숙청 작업에 반동분자로 낙인 찍혀 1938년 10월 14일 처형되었다.

1943년 8월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학생들의 조선회복연구단(朝鮮回復硏究團)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1943년 봄 비밀결사 명성회(明星會)가 조직되었는데, 청송 출신의 박동열(朴東烈)과 심훈(沈熏)이 참여하였다. 그 외 일본 지역에서 활동한 청송 지역 인사로는 민춘기(閔春基), 윤성택(尹成澤), 이기순(李琦淳) 등이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08 행정지명 현행화 부동면 -> 부동면[현 주왕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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