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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1493
한자 靑松-昭憲王后沈氏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병훈

[개설]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1395~1446]는 조선의 제4대 국왕 세종의 비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고려 문하시중 심덕부(沈德符)의 손녀이고, 영의정 심온(沈溫)[1375~1418]의 딸이며,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안천보(安天保)의 딸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과 가례(嘉禮)를 올려 빈(嬪)이 되고,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1417년(태종 17)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개봉(改封)되고, 1418년(태종 18) 4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敬嬪)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9월에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하니 12월에 왕후로 봉하여 공비(恭妃)라 일컬었다. 그러나 1432년(세종 14)에 중궁(中宮)에게 미칭(美稱)을 올리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라 하여 1432년에 왕비로 개봉되었다.

소헌왕후가 생존했던 시기는 조선이 건국된 후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체제를 정비해 가던 시기였다. 유교 사회로 변화된 조선에 필요한 각종 의례가 마련되었으며, 유교적 덕목이 보급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 소헌왕후는 국모의 역할에 충실한 왕비의 모범이었다. 8남 2녀를 낳아 왕실을 번성하게 하였으며, 내명부 수장으로서 국가 행사를 모범적으로 시행하였다. 또한, 세종이 예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왕비의 의례가 마련되면서 그 위상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소헌왕후의 삶은 영광스럽지만은 않았다. 중전이 되었지만, 태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인해 친정이 몰락하고 폐비(廢妃)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세종 즉위 초 소헌왕후의 위상은 죄인의 딸이라 하여 폐비가 거론될 만큼 취약하였다. 1426년(세종 8) 어머니 안씨와 가족들의 직첩(職牒)이 회복되었지만, 세종도 태종의 결정을 차마 번복하지 못하였기에 아버지 심온은 신원(伸冤)이 되지 못하다가 아들 문종이 즉위한 후에야 직첩을 돌려받게 되었다.

자녀들도 문종과 임영대군, 영응대군의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하여 며느리를 내치기도 했으며, 첫 번째 딸 정소공주는 1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평소 의지하였던 어머니 안씨가 1444년(세종 26) 사망하고, 수개월 후 5남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이 한 달 간격으로 사망한 것이다. 의지하고 아끼던 어머니와 자식들을 연이어 잃으면서 건강이 악화되었던 소헌왕후가 결국 1446년(세종 28)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사저에서 52세로 사망하자 헌릉(獻陵)에 장사지냈다. 뒤에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영릉지(英陵誌)』를 예조판서 정인지(鄭麟趾)가 제술하였다. 휘호는 ‘선인제성(宣仁齊聖)’, 시호는 ‘소헌(昭憲)’이다.

[소헌왕후로 인해 읍격이 높아진 청송]

소헌왕후를 배출한 청송심씨(靑松沈氏) 가문은 조선 건국 이래로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조선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은 국구(國舅)[임금의 장인]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상왕 태종은 그를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심온의 중용은 그가 새로이 국왕의 외척이 되었지만, 그전까지는 태종의 정책을 추진하였던 관료였으며, 갑작스럽게 즉위한 세종의 지지 기반이 되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종은 외척을 견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던 전례를 답습하여 세자 교체와 세종 즉위의 고명을 받기 위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던 심온이 귀국하자 ‘강상인(姜尙仁)의 옥사’에 연루시켜 사약을 내려 처형하였다. 이때 소헌왕후의 어머니 삼한국대부인 안씨와 동생들은 가산이 몰수되고 천인(賤人)이 되었으며, 소헌왕후를 폐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그런데도 세종의 즉위 이래로 왕비로서 소헌왕후의 지위는 꾸준히 성장하여 국왕과 후궁, 자녀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그녀를 존경하였다. 아울러 왕비의 격에 맞추어 소헌왕후의 관향(貫鄕)인 청송의 읍격을 높이는 일이 추진되었다. 청송은 고려시대 때부터 청부현으로 있다가 소헌왕후가 세종의 비가 되자 왕비의 고향인 청송의 급이 너무 낮다고 하여 1419년(세종 1)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되었다. 1459년(세조 5)에는 어머니 소헌왕후를 추모하려는 세조의 의지에 따라 청송군(靑松郡)을 승격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삼았다. 이후 청송도호부는 1895년 갑오개혁 때 군으로 다시 환원되기 전까지 437년 동안 도호부로 있었다.

이 외에도 청송에는 소헌왕후와 관련된 지명과 건물이 남아 있다. 소헌왕후 심씨의 시조인 심홍부(沈洪浮)의 묘소가 있는 보광산(普光山) 앞의 현비암(賢妃巖)청송심씨 가문에서 현비로 칭송받는 소헌왕후가 태어났다고 하여 명명되었다. 또한, 소헌왕후를 위하여 세종의 명으로 지청송군사(知靑松郡事) 하담(河澹)이 건립하였다고 전하는 찬경루(讚慶樓)만세루(萬歲樓)가 남아 있다. 현재 청송군은 찬경루 일대를 소헌공원으로 명명하여 운영하고 있다. 찬경루는 1428년(세종 10)에 지청송군사 하담이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소헌왕후의 여덟 왕자가 어머니를 위해 각 두 칸씩 건축하였다고도 한다. 찬경루 내에는 ‘송백강릉(松栢岡陵)’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썼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1792년(정조 16) 청송도호부사를 재임하던 한광근(韓光近)의 아들 한철류(韓喆裕)가 안평대군의 글씨를 옮겨 그대로 썼다고 전한다.

찬경루청송심씨 시조 심홍부 묘소의 재각(齋閣)으로 장마철 용전천의 범람으로 묘소로 갈 수 없을 때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찬경루’란 누각명은 경상도관찰사 홍여방(洪汝方)이 지은 것으로, 누각에 올라 심씨 시조묘를 보니 소헌왕후를 배출한 경사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88년에 보수하여 지었고, 그 뒤로도 수 차례 개보수하였다고 전한다.

만세루 역시 세종이 하담에게 명하여 청송심씨 시조인 심홍부의 묘 아래 건립한 재실로, 보광산에 있는 심흥부의 묘에 제사 지낼 때 비가 오면 이 누각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2호로 지정된 이후 2017년 9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09호로 승격되었다. 또한, 소헌왕후 심씨의 시조인 심홍부의 묘를 지키는 수호사찰(守護寺刹)로 보광사(普光寺)가 있다. 이 사찰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경내의 극락전(極樂殿)은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2014년 보물 제184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왕비의 모범이 된 소헌왕후 심씨]

예조판서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영릉지』에는 소헌왕후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전략) “왕후가 인자하고 어질고 성스럽고 착한 것이 천성(天性)에서 나왔는데, 중궁(中宮)에 정위(正位)한 뒤로는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조심하여 빈잉(嬪媵)[후궁]을 예(禮)로 접대하고, 아래로 궁인(宮人)에 미치기까지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은혜를 가하지 않음이 없으며, 후궁(後宮)이 나아와서 뵙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위로하고 용납하는 것을 가하며, 만일 상감께서 총애하신 자는 특별히 융성한 대우를 주어, 지극한 정[至情]이 사이가 없으며, 낳으신 여러 아들을 모두 후궁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시니, 후궁이 또한 마음을 다하여 받들어 길러서 자기 소생보다 낫게 하였으며, 또 일을 위임하여 의심하지 않고 맡기시니, 후궁이 또한 지성껏 받들어 순(順)히 하여 감히 게을리 함이 없었다. 이 때문에 빈(嬪)·잉(媵) 이하가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부모 대접하듯이 하였다. 서출(庶出)의 자식 보기를 모두 소생 아들과 같이 하였으며, 어선(御膳)[임금님께 올리는 음식]이 나오면 반드시 몸소 살펴보아 힘써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국모(國母)로 있은 지 29년 동안에 경계(儆戒)의 도움이 있고, 연안(宴安)의 사사(私事)가 없었으며, 한번도 친척을 위하여 은혜를 구하지 않았으며, 또 절대로 바깥일에 참여하지 않고, 비록 궁중에서 날마다 쓰는 자디잔 일이라도 반드시 위로 들리어 감히 임의로 하는 일이 없었다. 곤의(壼儀)[왕후의 덕]가 심히 발라서 덕화(德化)가 밖에 흘렀으며, 여러 아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반드시 의방(義方)으로 하여 인지(麟趾)·종사(螽斯)의 경사가 있었다. 대개 하늘이 성인(聖人)을 내매, 반드시 어진 배필을 지어서 지극한 다스림[至治]을 이루나니, 주(周)나라의 태사(太姒)는 풍아(風雅)에 파영(播詠)되어 천고(千古)에 빛났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이미 지극한 덕과 지극한 다스림으로 문왕(文王)의 뒤를 따랐는데, 왕후께서 또 이와 같은 덕과 행실이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지은 배합이 되어서,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예전에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후략) [『세종실록』 권 112, 28년(1446) 6월 6일]

성군으로 칭송받는 주나라 문왕이 후비(后妃)의 덕으로 자손이 많고 현명했듯이, 세종 역시 소헌왕후를 왕비로 맞이하여 많은 자녀를 낳고 성군으로 칭송받게 되었다고 비유한 것이다. 아울러 내명부를 잘 다스려 왕비와 후궁 간에 분쟁이 없이 지내고, 국모로 있는 29년 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하여서 사사로이 연회를 열거나 친척 즉 외척들에 대한 사적인 청탁이 없었으며, 정사에 관여하거나 작은 일도 임의로 처리하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그래서 소헌왕후의 올바른 덕이 여러 대군에게도 교훈이 되었다고 했다. 실제 소헌왕후는 조선 왕조에서 세종이 주나라 문왕에 비견되는 조선의 현군(賢君)으로 칭송받은 것처럼 현비(賢妃) 모범으로서 존경을 받았다.

1. 세종의 지지와 예제로 확립한 소헌왕후의 위상

소헌왕후가 왕비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고 현비로 인정받게 된 것에는 남편인 세종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세종은 유교문화의 정착을 위한 예제(禮制)의 정비와 행례(行禮)를 통해 소헌왕후의 왕비로서의 지위를 신하들에게 확인시킴으로써 소헌왕후의 위상을 높였다. 반역자의 딸로서 폐비의 위기에 몰렸던 소헌왕후의 위상이 세종의 지지와 예제 정비와 맞물려 제도적으로 재정립되었던 것이다.

세종대 정비된 ‘오례(五禮)’에는 왕비가 주체가 되거나 왕비를 위한 의례가 정비되었다. 특히, 왕비 중심의 의례가 많이 규정된 항목은 가례(嘉禮)였다. 가례는 왕실의 존엄성과 권위를 과시하려는 의미도 큰 의례였는데, 왕비가 주인이 되어 행해지는 의식을 정비하여 국모로서 왕비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 이와 관련된 의례로는 ‘납비의(納妃儀)’, ‘책비의(冊妃儀)’가 있는데, 소헌왕후는 이미 세종과 혼인을 했기에 ‘납비의’는 치르지 않았지만, 왕비로 책봉하는 ‘책비의’는 1432년(세종 14) 5월 11일 시행되었다.

세종은 왕실 구성원의 칭호를 정하고, 소헌왕후를 왕비로 칭하게 한 후 왕비 책봉 의주(儀註)를 정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소헌왕후의 책비의를 거행하였다. 이미 세종 즉위 시 공비로 책봉되었던 소헌왕후를 다시 왕비로 책봉하는 의식을 거행한 것이다. 소헌왕후는 근정전에서 왕비에 책봉되고 이를 축하하는 악장(樂章)이 더해졌으며, 영의정 황희(黃喜)[1363~1452]가 백관을 거느리고 이를 칭송하는 전(箋)을 올렸다. 소헌왕후는 제도적으로 마련된 의식을 통해 왕비로 다시 책봉됨으로써 국왕의 적처이자, 국모로서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1426년(세종 8) ‘중궁정지명부조하의(中宮正至命婦朝賀儀)’, ‘중궁정지회명부의(中宮正至會命婦儀)’, ‘중궁정지왕세자조하의(中宮正至王世子朝賀儀)’, ‘중궁정지왕세자빈조하의(中宮正至王世子嬪朝賀儀)’, ‘중궁정지백관조하의(中宮正至百官朝賀儀)’ 등의 의례를 제정하여 왕비가 주인으로서 주관하였다. 이들 의식은 왕비가 정월과 동지에 왕실 구성원 및 신료들에게 인사를 받는 것으로서, 소헌왕후는 이에 따라 세자와 백관의 하례를 의식에 따라 받게 되었다. 또한, 의식이 끝나면 연회를 주관하여 국왕의 정비(正妃)로서의 위상을 과시하였다. 소헌왕후는 왕실을 대표하는 여성으로서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고 연회를 주관함으로써 왕비로서의 위상을 정립할 수 있었다.

나아가 소헌왕후가 왕비로 책정된 1432년의 동지망궐례(冬至望闕禮)에는 백관들이 왕비에게 나아가 하례하도록 세종이 명령하고, 소헌왕후는 “왕의 뜻이 있어 동지의 경사를 경들과 같이 한다”는 답사(答辭)를 하였다. 망궐례에서 신하들이 중전에게 하례하고, 중전이 답사를 하는 것은 소헌왕후가 처음이었다.

항상 소헌왕후에게 미안함과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세종의 적극적인 지원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1424년(세종 6) 소헌왕후가 외조부 안천보의 집에 갈 때 종실, 재상 등 명부(命婦)[조선시대 국가로부터 작위를 받은 여인들의 통칭]들의 호종을 받고, 의식을 갖추어 거동하게 했다. 또한, 1432년에는 왕의 행차에 위엄을 보여 대외적으로 왕실의 존엄성을 표시하기 위한 각종 의식에 왕비를 포함시키고, 의장도 중국 당제에 따라 갖추도록 명하였다. 실제 소헌왕후가 어머니 안씨의 사저를 찾아갈 때마다 연(輦)을 타고 의장을 갖추고, 명부들을 대동하여 거동하고 연회를 베풀게 하였다. 이처럼 소헌왕후가 사가에 거동할 때 격식에 따라 의장을 갖추어 행차하게 함으로써 가까이에는 내외명부들에게 넓게는 백성들에게 왕비의 위엄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

소헌왕후는 제도적 예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행보를 통해서도 왕비로서의 위상을 세워나갔다. 1426년(세종 8) 소헌왕후가 금성대군을 임신 중일 때 세종이 외지로 나간 사이에 한성부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자 소헌왕후는 대신과 문무백관들에게 전교(傳敎)를 내려 “종묘와 창덕궁은 힘을 다하여 구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다행히 화재가 진압되자 다시 전교를 내려 “비록 피해가 크지만, 종묘가 보존된 것만이라도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왕비는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없었으며, 내관을 통한 의사전달은 있으나, 이처럼 전교를 통해 명을 내리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행보였다. 더 나아가 1439년(세종 21)에는 세종이 직접 나서서 혹시라도 자신이 여러 날 궁 밖에 있을 때 급한 일이 생기면 중전의 명령을 듣고 일을 시행하라고 함으로써 왕비에 대한 신뢰를 신하들에게 재확인시켰다.

2. 유교 윤리의 실천을 통해 만인의 존경을 받은 현비(賢妃)

1) 세종 위민정치의 내조

예제 정비를 통해 유교 통치의 구조를 완성한 세종은 유교의 윤리 개념인 ‘삼강오륜(三綱五倫)’을 통해 유교적 풍속을 완성하고, 민본사상을 내치의 기조로 삼아 백성을 위한 위민정치(爲民政治)를 위해 노력하였다. 소헌왕후 역시 국모로서 세종의 위민정치에 동참하고, 삼강오륜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야 했다. 세종대 위민정치가 잘 드러나는 것은 양로연(養老宴)이었다. 이것은 경로효친(敬老孝親)을 강조한 유교 사상을 통치자가 모범을 보인 것이며, 백성들을 귀천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같은 백성으로 대접한 인의(仁義) 정치를 시행한 것이다.

세종이 양로연을 치를 때면 소헌왕후는 노인 여성을 대상으로 연회를 베풀었으며,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참여하게 하였다. 1440년(세종 22) 양로연에서는 194명의 노인이 참석하였는데, 한 노부인이 소헌왕후앞에서 춤을 추면서 기쁨을 표현하였다. 소헌왕후는 생존 기간 전반에 걸쳐서 사정전(思政殿)에서 80세 이상의 노부인들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등 애민과 노인 공경의 유교 이념을 몸소 실천하였다.

이후 1442년(세종 24)에는 소헌왕후가 행차할 때 국모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겠다고 90세 노부인이 여자 종을 바치기도 하였다. 한편, 백성들의 고통도 함께하여 1427년(세종 9)에는 명나라에 공녀(貢女)로 떠나는 처녀들과 가족들을 궁궐로 불러서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어 주었다. 노인을 공경하고 백성들과 소통하며 고통을 함께했던 소헌왕후를 백성들 역시 국모로 생각하여 감사해 하였다. 세종의 위민정치에 참여한 소헌왕후는 부인으로서 내조의 공을 세운 것이기도 하였다.

2) 부덕(婦德)의 모범이 된 왕비

소헌왕후는 유교 윤리인 삼강오륜을 몸소 실천하며 유교 사회에서 부인이 갖춰야 할 덕목에 충실하며 모범이 되었다. 당시 세종은 내외법(內外法)을 강화하고 여성들의 윤리관을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여성들에게는 부인으로서 가계(家系)를 계승하고, 투기(妬忌)하지 않으며,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특히, 왕실에 있어서 여성들의 가장 큰 소명은 자손을 많이 낳아서 왕실을 번성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소헌왕후는 역대 왕비 가운데 가장 많은 8남 2녀를 출산함으로써 그 임무에 충실하였다. 소헌왕후는 세종이 즉위하기 이전에 이미 3남 2녀를 두었으며, 즉위 후 많은 후궁을 두었음에도 둘 사이에 다섯 형제를 더 낳았다. 친정이 화를 입고 폐비가 논의될 때도 지위를 지킬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도 역시 자녀를 많이 낳은 공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일부일처제가 법제화하면서 처첩 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 유교 사회에서 부인은 투기하지 않는 후덕함을 갖춰야 했다. 세종은 즉위한 이래로 신빈김씨(愼嬪金氏), 혜빈양씨(惠嬪楊氏)를 포함하여 직첩을 받은 후궁이 6명이 있었으며, 이들과의 사이에서 12명의 자녀를 두었다. 소헌왕후는 이들 후궁을 예로써 대접하고, 세종이 총애하는 신빈이나 혜빈은 특별히 대우해 주었다. 후궁 소생들을 차별하지 않고 왕후의 자녀들과 같이 양육하였다. 이처럼 후궁을 대우해 주자 세자빈이 단종을 낳고 사망하자 혜빈양씨가 단종과 경혜공주를 양육해 주었으며, 신빈김씨는 소헌왕후의 8남 영응대군의 유모로 양육을 도왔다. 왕실 내 비빈 간의 관계가 돈독할 수 있었던 것은 소헌왕후의 인자함에서 비롯한 것으로, 왕실을 편하게 하여 세종의 치세에 도움을 주었다.

이외에도 시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산신과 성황신에 기도하며 며느리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 1420년(세종 2) 원경왕후가 사망한 후에는 태종에게 후궁을 들여 주어 위로하고자 처녀들을 친히 불러서 살피는 등 시아버지에게 효도를 다하였다. 자녀들에게도 부부간의 도리와 검약을 가르쳐 왕실 구성원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몸소 물레질을 하고 빨래를 하며 며느리들에게 교만과 사치를 경계하고, 공주와 옹주가 혼인할 때 채백(綵帛)이 아닌 면주(綿紬)를 사용하여 검약하도록 했다.

이러한 소헌왕후에 대해 세종은 존경과 신뢰로 보답하였다. 세종은 대군 시절부터 소헌왕후를 존경하여 그녀가 나아가고 물러날 때는 세종도 반드시 일어나서 대하였으며, 부득이 국왕이 부재 시에는 왕비의 말을 백관들이 따르게 하였으며, 평소에도 “나는 중궁의 말한 바를 옳게 여기고 있다”고 하며 소헌왕후의 뜻을 존중하였다. 나아가 세종은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자신이 직접 합장을 명하였고 자신이 죽기 전까지 다른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다. 이처럼 소헌왕후는 어진 덕으로 인해 남편과 후궁,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왕비였다.

[화려한 왕비의 삶 속에서 개인적 아픔을 참고 인내하였던 여인]

소헌왕후가 조선시대 내내 존경을 받은 것에는 세종의 업적도 있지만, 남편의 치세를 위해 그녀가 감수하였던 고통과 인내 그리고 지혜로운 대처에 따른 것이었다. 소헌왕후는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어머니와 친정 가족들이 천인으로 몰락하면서 폐비가 거론될 만큼 즉위 초에는 취약한 위상을 가졌었다. 그러나 세종을 깊게 이해하고 내조하면서 내명부를 잘 통솔하여 세종이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은 세종이 즉위한 후 영의정에 올라서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었는데 귀환하던 중 그의 아우 심정이 상왕이었던 태종 이방원이 군국대사를 처리한다고 불평하기에 이르니 이 일로 대역(大逆)의 옥사가 일어남으로써 심온이 그 수괴로 지목되어 사사되었다. 이 사건은 세종이 즉위하자 상왕으로 있던 태종이 외척들의 권력을 경계하려는 뜻에서 일으킨 옥사였다. 그렇기에 조정에서 소헌왕후의 폐비 논의가 있었지만, 태종은 신하들의 의견에 반대하고, 후궁을 들이는 것으로 무마하였다.

소헌왕후는 자기가 왕비가 되었기 때문에 친정이 고초를 겪은 것에 대하여 항상 부담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내하며 왕비로서의 직무에 충실하였다. 후궁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자녀들의 양육에 더욱 정성을 쏟았다. 그런 가운데 1424년(세종 6) 큰 딸인 정소공주(貞昭公主)가 사망하면서 더욱 슬픔이 커져 갔다. 이에 세종은 1426년(세종 8) 소헌왕후의 어머니 순흥안씨와 가족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왕비를 달래었지만, 태종이 판결한 심온의 신원은 차마 회복하지 못하였다.

왕비이자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던 소헌왕후였지만 며느리 문제로 다시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되었다. 큰아들인 세자 이향(李珦)[문종(文宗)]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던 휘빈김씨(徽嬪金氏)가 세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자 세자의 마음을 돌리려고 교미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만들어 술에 타거나, 세자가 좋아하는 여인의 신발을 태우는 등의 행동을 일삼다가 발각되어 1429년(세종 11) 폐출되었다. 그 이후 세자빈으로 들어온 순빈봉씨(純嬪奉氏)는 휘빈김씨에 비해 용모는 뛰어났지만, 그녀 역시 세자와 성격 차이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세자가 빈궁전을 찾지 않자 봉씨는 궁녀 쌍기와 동성연애 즉 대식(對食)에 빠졌고, 이것이 알려져 1436년(세종 18) 폐출당하였다. 한편, 1431년(세종 13) 세자의 후궁으로 들어와 있던 승휘(承徽) 권씨(權氏)가 1437년(세종 19) 세자빈에 올랐지만, 1441년(세종 23) 원손[단종(端宗)]을 출생하고 3일 후에 산후병으로 사망하면서 현덕(顯德)이란 시호를 받았다.

1439년(세종 21)에는 넷째아들 임영대군이 궁녀들과 사통하여 세종이 관련자들을 벌주고 임영대군의 직첩까지 빼앗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평소 후궁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였던 소헌왕후가 임영대군의 유모를 통해 이러한 일들을 전달받았고 이를 세종에게 전달하면서 드러났던 것이다. 폐출된 세자빈들의 비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즉 소헌왕후는 궁내의 내명부를 완전히 통제하면서 비록 자식이라도 잘못된 일에는 엄하게 대처하였다. 이처럼 맏며느리들의 연이은 폐출 사건과 아들의 비행으로 소헌왕후는 마음이 아팠지만, 왕후로서의 품위와 행실을 잃지 않고 후궁들과 대군(大君)들의 행동을 살핌으로써 더 이상 문제가 생기지 않게 단속하였다. 실제 이러한 조처는 세종의 치세에도 도움을 주었다.

1446년(세종 28) 3월 24일 소헌왕후는 52세로 승하하였다. 소헌왕후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세자와 여러 대군은 어머니의 쾌유를 기원하며 사찰과 산사 등지에서 기도를 올렸으며, 문종은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였다. 인자하고 현명한 왕비로 칭송받은 소헌왕후였지만, 마음속 아픔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음을 알았던 세종과 자녀들은 그녀의 고통을 덜어 주고 있었다. 결국,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세종은 평소 불교에 의지했던 왕비를 위하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양대군에게 불경을 짓게 하고, 중전을 간택하라는 신하들의 청을 물리치며 소헌왕후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1447년 수양대군이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부처의 일대기를 언문(諺文)으로 정리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어 올리자, 이를 읽고 세종이 직접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여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었다.

유교문화의 제도적 정착과 보급에 노력하였던 세종이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불경을 제작하고, 스스로 가사(歌詞)를 지은 것은 그만큼 소헌왕후에 대한 애정과 미안함이 컸음을 나타낸다. 이들 책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더불어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한국 최초의 서적들로 평가받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소헌왕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전해주는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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