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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1037
한자 鄕校
영어공식명칭 Hyanggyo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
집필자 백지국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에 설립된 조선시대 지방 국립 교육 기관.

[개설]

향교(鄕校)는 고려시대에 시작하여 조선시대 완비된 지방의 관학[국립 교육] 기관이다. 향교는 문묘(文廟)가 있는 교화의 중심지이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의 공간이었다. 나아가 그 지역 세력들이 출입하여 활동하는 장소로 향촌 자치 기구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서원(書院)의 보급과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교육과 향촌 자치 기구의 기능과 역할이 약화되었다. 하지만 향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기구이자 군역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으므로, 양반·중인·양인 등은 여전히 향교에 소속되기를 원하였다.

1894년(고종 31) 과거제도의 폐지로 향교는 교육 기관의 기능이 거의 상실되었으나, 제향의 기능만은 유지한 채 존속하여 왔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향교는 231개소이다. 북한의 경우 1950년대까지 상당수가 남아 있었으나, 그 이후의 상황은 알 수 없다.

[청송 지역 향교의 건립]

성리학(性理學)을 국가 이념으로 선택한 조선 정부는 향촌 사회에 유교 이념을 보급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공간으로서 향교를 활용하였다. 1읍1교(一邑一校)의 원칙 아래 고을마다 향교가 설립되어, 성종(成宗) 시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확립되었다.

청송군은 조선시대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진보현(眞寶縣)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관내에 청송향교(靑松鄕校)진보향교(眞寶鄕校) 두 개의 향교가 있다. 청송향교는 1426년(세종 8) 또는 성종 연간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진보향교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관련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청송 지역 향교의 기능과 구조]

향교는 중앙의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成均館)의 축소형으로, 지방민의 교화와 인재 양성을 위한 공간이었다. 제향 공간인 대성전(大成殿)과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냈다. 강학 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동재·서재에서는 교생(校生)들이 기숙하며 유학 경전을 공부하였다. 향교를 출입하던 재지세력(在地勢力)들은 이곳에서 향론을 결정하며, 향교를 향촌 자치 기구로서 활용하였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서원이 보급되면서 점차 교육과 향촌 자치 기구로의 역할은 상실되고 제향의 기능만이 강조되었다.

청송군에 설치되었던 청송향교진보향교 역시 이 지역의 교육과 제향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향촌 자치 기구로서 활용되었다. 이러한 기능에 맞추어 건물도 세워졌다. 청송향교는 크게 제향 공간인 대성전(大成殿), 동무(東廡), 서무(西廡), 대성문(大成門)과 강학 공간인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書齋)로 구성되어 있다. 대성전을 서쪽, 명륜당을 동쪽에 둔 좌학우묘(左學右廟)의 배치 형태이다. 진보향교는 크게 제향 공간인 대성전, 내삼문과 강학 공간인 명륜당, 동재, 서재, 외삼문(外三門)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학 공간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제향 공간이 뒤에 자리 잡은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 형태이다.

[청송 지역 향교의 인적 구성]

향교의 인적 구성은 크게 교임(校任), 생도(生徒), 교복(校僕) 등으로 구성된다. 조선 정부는 향교의 교육과 운영을 담당하기 위해 교수(敎授), 훈도(訓導) 등의 교관을 파견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는 종6품의 교수, 군(郡)·현(縣)에는 종9품의 훈도를 파견하였다. 청송향교는 종6품의 교수, 진보향교는 종9품의 훈도가 파견되었다.

파견된 교관들은 향교의 교육과 운영을 담당하였으나, 임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당장(堂長), 장의(掌議), 유사(有司) 등의 학생 대표를 선발하여 돕도록 하였다. 하지만 서원(書院)이 보급되면서 향교의 기능이 약화되자 점차 교수와 훈도의 지위가 낮아지면서 17세기 이후에는 교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이에 향교는 관학인 관계로 수령의 통솔 아래 있었으나, 실제 운영은 유생 대표들이 맡게 되었다. 이들을 총칭하여 교임(校任)이라 하였다. 향교의 교임은 교장(校長)[도유사(都有司)], 장의, 색장(色掌) 등이 있으나 모든 향교가 동일한 명칭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청송향교의 교임은 자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진보향교의 경우 교임으로 활약했던 인사들의 명단과 교체 연월을 자세히 기록한 1896년 경상북도 진보군 진보향교 『체임록(遞任錄)』, 1902년 경상북도 진보군 진보향교 『체임록』, 1914년 경상북도 진보군 진보향교 『체임록』 등이 전해지고 있다. 진보향교의 교임으로는 도유사와 장의가 확인된다. 한 명의 도유사, 한 명의 장의 체제로 유지되었다.

향교에 입학할 수 있는 교생(校生)의 자격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어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경국대전』에 “16세 이하는 액내(額內)에 들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입학할 수 있는 연령은 17세로 짐작된다. 1472년(성종 3) 홍문관(弘文館)에서 올린 계(啓)에 따르면, 15세에 향교의 교생이 될 수 있었다. 안동부의 「신정십조(新定十條)」에는 20세가 되어야 향교에 입교할 수 있었다. 이처럼 15세, 17세, 20세 등 향교에 입학할 수 있는 연령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였다. 청송향교진보향교의 경우 자료의 소략으로 입학 연령은 알 수 없다.

교생의 정원은 태종(太宗)이 「수령칠사(守令七事)」를 통해 유수관(留守官) 50명, 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 40명, 지관(知官) 30명, 현(縣) 15명으로 규정하였다.『경국대전』에 이르러서는 부(府)·대도호부·목 90명, 도호부(都護府) 70명, 군(郡) 50명, 현(縣) 30명으로 두 배가량 증원되어 법제화하였다. 이것은 조선 후기까지 법제적으로 유지되었다. 청송향교의 법제적 정원은 70명, 진보향교의 정원은 30명이었다.

향교의 운영에는 재정이 필요하였으므로 정부는 학전(學田)과 노비를 지급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노비를 부 30명, 대도호부·목 25명, 도호부 20명, 군·현 10명씩 차등 지급하였다. 이 사항은『대전회통(大典會通)』의 기록까지 변동이 없다. 이것으로 추정해 보면, 당시 청송향교에는 20명, 진보향교에는 10명의 노비가 지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송지역 향교 현황]

청송향교는 2012년 6월 11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3호로, 진보향교는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되어 보호 및 관리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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