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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808
한자 徐孝源
영어공식명칭 Seo Hyowon
이칭/별칭 백순(百順),석간(石澗)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39년 9월 25일연표보기 - 서효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6년 3월 - 서효원 청송의진 참가
활동 시기/일시 1896년 5월 - 서효원 감은리전투 참가
활동 시기/일시 1896년 6월 - 서효원 경주성전투 참가
활동 시기/일시 1896년 7월 - 서효원 영덕전투 참가
몰년 시기/일시 1897년 8월 6일연표보기 - 서효원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6년연표보기 - 서효원 건국포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896년 5월 14일 - 감은리전투
출생지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
활동지 청송의진 - 경상북도 청송군
묘소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지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청송의진 의영도지휘사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장.

[개설]

서효원(徐孝源)[1839~1897]은 1896년 창의한 청송의진(靑松義陳)의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청송의진의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에 선임되는 등 창의 때부터 해산할 때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계]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백순(百順), 호는 석간(石澗). 1839년 9월 25일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에서 아버지 서문희(徐文熙)와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태종 때의 문신 달성군(達城君) 서진(徐晉)의 후예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매야(邁埜) 서활(徐活)이다. 14살에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20살에 이웃으로 이거한 만산(萬山) 유치엄(柳致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세산(洗山) 유지호(柳止鎬), 열능(列陵) 신관조(申觀朝), 졸수재(拙修齋) 유정호(柳廷鎬),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등과 교유하며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강론하는 등 성리학의 공부에 전념하였다. 경학과 성리학에 밝았다. 서효원의 문하에는 청송 출신의 유생 서효신(徐孝信), 서효격(徐孝格), 서효달(徐孝達), 김숭진(金崇鎭) 등이 있다.

[활동 사항]

1896년 1월 안동의진(安東義陣)과 예안의진(禮安義陣)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이 청송 지역에 전해졌고, 곧이어 고종의 애통조(哀痛詔)와 주변 각 의병진에서 발하는 통문(通文)과 격문(檄文)이 날아들었다. 3월 2일에는 안동의진의 안동부(安東府) 점령과 안동관찰사(安東觀察使) 김석중(金奭中)의 도망 등에 관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송군수 남유희(南有熙) 역시 도망간 상태였다. 3월 9일 안동의진의 소모장(召募將) 유시연(柳時淵)이 청송 관아의 무기고를 열고 병기를 탈취하고 격문을 발하여 창의하지 않는 이유를 추궁하는 등 겁박하였다. 이에 서효원은 3월 10일 청송향교(靑松鄕校)의 향원(鄕員) 100여 명이 모인 향회(鄕會)에서 심관지(沈灌之) 등과 함께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내걸고 창의를 추진하였다.

서효원은 3월 12일 청송 유림 200여 명과 함께 청송향교에서 향회를 개최하여 창의를 결의하고, 이날 오후 객사(客舍)에서 심성지(沈誠之)를 창의장(倡義將)으로 추대하였다. 유림들은 3월 15일 부장(副將) 조성박(趙性璞), 우익장(右翼將) 권성하(權成夏), 좌익장(左翼將) 김상길(金相吉)을 내정하고 참모(參謀)와 서기(書記) 이하를 선발하였으며, 3월 16일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창의하였다. 3월 17일 서효원권탁수(權鐸洙), 심관지(沈灌之), 민성호(閔晟鎬), 이중성(李中性), 조성눌(趙性訥) 등과 함께 백의종사(白衣從事)에 차출되어 천신과 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서효원은 축문(祝文)을 지어 축원하였으며, 김상길(金相吉)은 창서사(唱誓辭)를 낭독하였다. 3월 22일 청송의진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中軍將),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을 소모장에 임명하여 진용을 갖추었다. 이때 서효원은 의영도지휘사를 맡아 서효신, 서효격, 서효달, 김숭진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주도하였다.

서효원청송의진의 진용을 확충하는 한편,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는 등 군세를 확장하였다. 4월 18일 김진구(金鎭九)를 현서외방장(縣西外防將), 4월 21일 심의철(沈宜喆)을 부서외방장(府西外防將)으로 삼아 본진에서 멀리 떨어진 면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주변 지역의 의병부대와 연결하기 위해 5월 9일 흥해출진소(興海出陣所), 5월 22일 영덕출진소(盈德出陣所)를 설치하였다. 또한 5월 12일 관군에게 패한 의성의진(義城義陣)이 청송으로 들어와 도움을 요청하자, 5월 13일 의성의진 및 이천의진(利川義陣)과 진용을 합쳐 의성연합의진(義城聯合義陣)을 결성하였다. 5월 14일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 뒷산에서 벌어진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5월 24일 청송의진은 고종의 해산 칙유문(勅諭文)을 받고, 5월 25일 청송군 관내 8개 면으로 분진(分陣)을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부장 조성박을 현내(縣內), 사병도총(司兵都摠) 남승철(南昇喆)을 현동(縣東)과 현남(縣南), 중군장 김대락을 현북(縣北), 선봉장(先鋒將) 홍병태(洪秉泰)를 현서(縣西), 우익장 서효신을 부동(府東), 좌익장 권성하를 부내(府內), 소모장 심능장(沈能璋)을 부서(府西) 등의 외방장에 임명하여 면군체제(面軍體制)로 전환하였다.

서효원은 6월 15일 경주연합의진(慶州聯合義陣)의 결성에 참여하여 6월 18일 경주성전투(慶州城戰鬪)를 벌였으며, 6월 28일 영덕연합의진(盈德聯合義陣)의 결성에 참여하여 7월 13일과 14일 영덕전투(盈德戰鬪)를 벌이는 등 8월경까지 활동하였다. 청송의진이 해산한 뒤 서효원은 향리에 부강서당(鳧江書堂)을 지어 자질(子姪)들의 교육에 힘쓰다가 1897년 8월 6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석간집(石澗集)』 8권 4책이 있다. 1916년 서효원의 장남 서석화(徐錫華)가 편집·간행하였다.

[묘소]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지리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9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08 행정지명 현행화 부동면 -> 주왕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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