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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801
한자 朴柱翰
영어공식명칭 Park Juhan
이칭/별칭 박우석(朴禹錫),박주구(朴柱九)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3년연표보기 - 박주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박주한 흠치교 입교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박주한 8인조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23년연표보기 - 박주한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박주한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경상도 청송도호부 구산리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구산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도 청송도호부 구산리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구산리 지도보기
활동지 경상북도 청송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흠치교 8인조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주한(朴柱翰)[1893~1923]은 1920년 음력 7월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오산동(梧山洞) 오항산 제실(祭室)에서 치성을 하고 차경석(車京錫)을 교주로 하는 흠치교(吽哆敎)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 잡혔으나 면소(免訴) 처분으로 풀려났다.

[활동 사항]

박주한은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구산리에서 출생하였다. 1920년 음력 7월 전라북도 정읍에 본부를 두고, 개조(開祖) 강일순(姜一淳)의 고족제자(高足弟子) 차경석을 교주로 하는 흠치교에 입교하였다. 흠치교의 목적은 독립운동의 자금 모집에 있었는데, 이름을 종교에 의지하여 널리 교도를 모집하고 자금을 모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교칙에 따르면 흠치교에 정도(精道)하면 둔신술을 알게 되어 전쟁에서 이길 수밖에 없는데, 1924년 갑자년에 천하가 통일되고, 교주 차경석이 계룡산에 도읍하여 제왕이 되면서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 흠치교의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흠치교의 조직은 교주 아래 60방위 곧 60명의 고문을 두고, 그 하위에 각자가 차례로 6인조, 8인조, 12인조, 15인조라는 교도의 계급으로 하부 조원을 조직하였는데, 박주한은 8인조에 가입하였다. 또 교도가 되려면 각자 그 취지에 찬동하여 거주지나 그 근처에서 닭의 생피나 산수(山水)를 마시고 치성(致誠)을 드려 맹세를 하고 치성비를 출자하도록 하였다. 치성비는 60방위는 50원, 6인조는 30원, 12인조는 15원, 8인조는 10원, 15인조는 5원을 상위자에게 납부하여 그 일부는 제사 비용에 충당하되 나머지는 본부로 보내 독립 자금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박주한은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오산동 오항산 제실에서 치성을 올리고 치성비는 1원을 상위자인 조규영(趙圭永)에게 납부하였다.

당시 흠치교는 표면적으로는 종교를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국권회복운동을 목적으로 하였고, 교세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각지로 확산되고 있었다. 박주한은 상위자의 선전대로 흠치교를 다른 사람에게 권유하며 치성비를 징수하는 과정에서 잡혀, 1921년 6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그해 12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경찰서의 즉결 처분에 의한 구류형 집행이 이미 종결되었다는 판결로 면소 출감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5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공훈록』16(국가보훈처, 2006)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1921. 6. 22.)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21.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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