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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790
한자 南錫仁
영어공식명칭 Nam Seogin
이칭/별칭 우팔(禹八),남우팔(南又八)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8년 4월 12일연표보기 - 남석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6년 3월 - 남석인 청송의진 의병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06년 3월 - 남석인 산남의진 청송지역 소모장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07년 09월 15일연표보기 - 남석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남석인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896년 5월 14일 - 감은리전투
출생지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
활동지 청송의진 - 경상북도 청송군
활동지 산남의진 - 경상북도 영천시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산남의진 청송 지역 소모장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장.

[개설]

남석인(南錫仁)[1878~1907]은 1896년 3월 청송의진에 참여하였고, 1906년에는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청송 지역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였다.

[가계]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우팔(禹八), 이명은 남우팔(南又八). 1878년(고종 18)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현동면(縣東面) 도평리(道坪里)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896년 의병이 전국적으로 창의(倡義)의 기치를 올리자 남승하(南昇夏), 남석구(南錫球), 남석술(南錫述), 남석우(南錫佑) 등과 함께 청송의진(靑松義陣)에 참여하여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 등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 후 남석우(南錫佑)의 포군에서 종사(從事)로 활동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906년 3월 고종의 시종관 정환직(鄭煥直)의 아들 정용기(鄭鏞基)가 경상북도 영천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창의하자, 청송 지방의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서종락(徐鍾洛), 남석구(南錫球), 임중호(林中虎), 심일지(沈一之) 등과 모병 활동을 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906년 4월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鄭鏞基)가 신광면(神光面) 우각(牛角)에서 아버지 정환직이 체포되었다는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 참령(參領) 신석호(申錫鎬)의 편지에 속아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정용기가 대구의 경상감영에 수감되고 난 뒤, 남석인은 영천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용기의 사촌 정사홍(鄭士弘)이 거느린 의병 30여 명만 남아 있는 산남의진에 들어가 부대의 전열을 정비하였다. 4월 12일 이운경(李雲景), 정천여(鄭千汝), 남석문(南錫文) 등과 함께 출전하였다. 무기는 화승총 25자루뿐이었다.

남석인은 4월 13일 경주 하옥동(下玉洞)을 거쳐, 영덕 청련사(靑蓮寺)로 들어갔다. 이 청련사에서 산남의진의 중군(中軍)이었던 이한구(李韓久)의 지휘를 받아 부서를 개편하였는데, 남석인은 우익장(右翼將)에 임명되었다. 4월 26일 의병 80여 명을 이끌고 경주로 향해 진군하였다. 이날 정오에 영덕 적암(赤巖)에 도착하자 경주진위대 병정 30명이 총을 쏘며 습격하였다. 이에 부대를 해산하고 영덕(盈德) 옥동(玉洞)으로 돌아와 수습된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청송으로 귀환하였다.

한편 정환직의 주선으로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5월 산남의진을 다시 일으켰다. 정용기가 이끄는 산남의진은 서울 진공(進攻)을 목표로 의병진을 재편성하고, 우선 관동(關東)으로 진출하기 위해 신돌석부대(申乭石部隊)를 지원하며, 동해안으로 척후병을 파견하는 등 북상의 길을 찾고 있었다. 이때 정사홍이 청송으로 찾아와 창의할 것을 권유하였다.

1907년 5월 정사홍의 권고로 의병 30명을 모집하여 영천군 자양면(紫陽面) 보현리(普賢里)에 있는 거동사(巨洞寺)로 갔다. 여기에서 의병장 정용기를 청해 함께 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뜻이 맞지 않았으므로 결별하였다. 그래서 정사홍과 함께 청송, 흥해 등지를 전전하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7년 6월 정사홍과 뜻이 맞지 않았으므로 다시 정사홍과 결별하고 포군 20명을 거느리고 청송 보현산(普賢山)으로 들어가 유진(留陣)하였다. 그리고 포군을 모집하기 위해 영일군 죽장면 입암(立巖)으로 들어가던 중, 6월 19일 순검을 만나 고향으로 피신하였는데, 6월 20일 청송에서 순검에게 체포되었다. 1907년 9월 4일 경상북도 재판소에서 종신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9월 15일 무기 은닉처를 추궁받는 과정에서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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