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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780
한자 金斗鎭
영어공식명칭 Kim Dujin
이칭/별칭 김성칠(金星七)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3년연표보기 - 김두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김두진 독립군 자금 모집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김두진 독립군 자금 모집 중 체포 투옥
몰년 시기/일시 1944년연표보기 - 김두진 사망
출생지 경상도 진보군 남면 모곡동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황목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도 진보군 남면 모곡동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황목리 지도보기
활동지 경상북도 안동군 - 경상북도 안동시
활동지 경상북도 영양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두진(金斗鎭)[1873~1944]은 청송군 진보 출신으로 1913년 안동 출신 의병장 유시연(柳時淵)의 지휘 아래 경상북도 안동·영양·영주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잡혀 징역 15년의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김두진은 1912년경부터 유시연의 지휘 아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안동 출신 유시연은 1896년 1월 안동의진(安東義陣)의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면서 청송 지역까지 들어가 병사와 무기를 모집하였다. 그 뒤 3월에는 안동의진의 선봉장이 되어 경상북도 북부 지역 연합의진이 감행한 함창(咸昌) 태봉전투(台峰戰鬪)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3월 29일 아침부터 온종일 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패하였다.

유시연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후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1908년 초까지 안동·청송·영양·영덕 일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하지만 1908년 2월 28일 안동 임동면 봉황사(鳳凰寺)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뒤 의진을 해산하였다. 유시연은 재기를 위해 1911년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1912년 독립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입국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두진은 유시연의 지휘 아래 김성칠(金星七)이란 이름으로 조박용(趙博容), 구석규(具錫圭), 유명호(柳命鎬), 이승기(李承畿) 등과 함께 안동과 영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1913년 6월 10일[음력 5월 6일] 영주군 문수면 반구시장에서 밀정 천모(千某)의 밀고로 유시연을 비롯하여 모두 잡히고 말았다. 1913년 9월 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유시연은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김두진은 조박용, 구석규, 유명호, 이승기와 함께 징역 15년을, 그 밖의 동지들은 각각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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