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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54
한자 衡平運動
영어공식명칭 Hyeongpyeong Undong|Social Equality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허종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청송 지역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백정 출신의 주도로 전개된 사회운동.

[개설]

형평운동은 1923년 진주에서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가 조직되어 1935년 대동사(大同社)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12년간 전개된 백정(白丁)들의 신분 차별 철폐 운동이다.

[형평운동의 배경]

백정은 전통 사회에서 최하층 천민이었다. 1894년 제1차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백정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인간적 멸시는 일제강점기까지도 계속되었다. 1920년대 초반 전국의 백정은 3만 3000여 명에 이르렀고, 경상북도 지역에만 6,100여 명이 존재하여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1920년대 후반 경상북도 지역의 백정은 7,400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청송 지역에는 23가구에 114명이 존재하였다.

백정들은 수육 판매업, 농업과 유기 제조, 도축 기술자 등에 종사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넓혀 나갔다. 하지만 사회적 차별과 인간적 멸시가 계속 되어 사회에 대한 불만이 컸다. 1920년대 초반 각계각층이 권익을 옹호하고 권리를 신장시키려는 대중운동을 전개하자, 백정도 영향을 받아 자신들에 대한 차별 폐지 운동을 준비하였다.

[형평분사의 설립]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 지역에서 백정 출신 인사들이 백정들에 대한 차별을 폐지하여 저울처럼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취지를 내세우며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를 창립하였다. 형평사가 창립된 후 형평운동은 언론과 사회단체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후원을 받으면서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지방에서는 도 단위에서 지사, 군과 읍 단위에서는 분사가 설치되었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1923년 대구를 시작으로 15개의 지사와 분사가 설립되었고, 1929년까지 23개의 지사와 분사가 설립되었다. 청송 지역에서도 청송면에 형평사 청송분사가 설립되었다. 형평운동의 목표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철폐하여 평등한 권리와 인간 존엄성을 획득하고, 백정의 생활과 생존권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청송 지역에서도 형평사 청송분사가 설립된 후 야학과 강습소 등의 운영을 통한 교육과 연설회와 강연회를 통한 계몽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형평분사의 활동]

형평운동은 백정에 대한 편견과 사회적 차별이 강하게 존속하던 사회에서 순조롭지 전개되지 못하였다. 대표적으로 1925년 8월 경상북도 예천 지역에서 일반인들이 형평사 예천분사를 습격하여 사무실을 부수고 형평사원을 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1924년부터 1929년까지 모두 38건의 충돌이 일어났다. 청송 지역에서도 1925년 10월 형평사 청송분사의 사무실을 청송면에서 진보면으로 이전하였다. 형평사 청송분사의 위치가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사무실 이전 이유로 밝혔지만, 예천 사건의 영향 속에서 형평운동에 반감을 가진 일반인과의 갈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형평 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기도 하였으며, 1920년대 후반 들어 백정의 신분 해방 운동에 중점을 두는 온건파와 계급 운동을 중심으로 다른 대중운동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급진파로 분열되는 혼란을 겪었다. 1930년대 중반 형평사는 백정의 사회적 지위 향상만을 도모하고 일제에 타협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민족운동에서 이탈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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