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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41
한자 大韓光復會
이칭/별칭 광복회,광복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5년 7월연표보기 - 대한광복회 결성
해체 시기/일시 1918년 1월연표보기 - 대한광복회 해체
성격 독립운동 단체
설립자 박상진|채기중 외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청송 출신 권영만이 활동한 독립 운동 단체.

[개설]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는 1910년대 민족운동을 대표하는 비밀결사 단체로 군자금 모집과 관공서 습격 및 친일 부호 처단 등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청송 출신으로는 권영만이 본부 요원으로서 경주의 세금 우편마차 습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설립 목적]

대한광복회의 창립 목적은 조직과 시설을 갖추고, 이를 기반으로 군자금을 확보하여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지원하며, 이를 통해 양성되는 독립군으로 적당한 시기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지부를 설치하는 한편 국내외에 많은 연락기관을 설치하였다.

[변천]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에 의해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되었다. 풍기광복단은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基中) 등 의병계열 인물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반면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대구 앞산 안일암(安逸巖)에서 박상진(朴尙鎭), 서상일(徐相日) 등이 결성한 계몽 단체였다.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결합에는 채기중과 박상진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대한광복회의 조직은 경상도 지역뿐 아니라 전국 8도와 만주 지역 인사까지 포괄하여 사령관, 지휘장, 지부장, 본부회장, 만주사령관 등의 부서로 조직되었다. 그중 총사령관은 박상진, 지휘장에는 우재룡(禹在龍)과 권영만, 지부장에는 채기중과 김한종(金漢鍾) 등이 선임되었다. 초기 회원 수는 약 80명 정도였는데, 이들 회원들을 규합하는 데는 총사령관 박상진을 비롯해서 지휘장 우재룡과 권영만, 지부장 채기중과 김한종 등이 활동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한광복회의 창립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는 일이었고, 비밀·암살·폭동·지령 등 4대 행동강령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활동 계획으로 활동 조직과 기구의 설치, 군자금 모집, 독립군 양성, 무기 구입, 친일 부호 처단 등이었다. 청송 지역과 관련해서는 대한광복회의 지휘장으로 선임된 권영만의 활동이 주목된다.

권영만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났고, 성장하면서 본적지인 영양군 입암면 병곡리로 들어와 살았다. 그 뒤 진보향교(眞寶鄕校)를 드나들면서 1922년경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로 이주하였던 것 같다. 권영만진보향교의 유안(儒案)에 이름이 올라 있을 정도로 재지사림(在地士林)으로서 위치를 굳건히 하였다.

권영만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략적 책동이 극심해지자 의병항쟁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의병항쟁이 실패로 끝나자 권영만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본부 지휘장에 선임되었다. 권영만은 지휘장 우재룡과 함께 1915년 12월 23일 경주·영일·영덕 등 3개 군에서 징수한 세금을 수송하는 우편마차를 경주군 광명리[지금의 경주시 광명동] 효현교(孝峴橋)에서 습격하여 관금(官金) 8,700원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우편마차에 대한 정보는 재무부장 최준(崔浚)이 제공하였다. 이 사건을 당시 언론에서는 ‘경북우편마차암습사건(慶北郵便馬車暗襲事件)’이라 하여 자세하게 보도하였다.

대한광복회는 1918년 1월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한 뒤 장두환(張斗煥), 김경태(金敬泰), 임봉주(林鳳柱) 등 여러 관련 인물들에 이어 총사령관 박상진이 잡히면서 막을 내렸다.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서는 권영만이 이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권영만은 본부 요인으로서 대한광복회 활동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경북우편마차암습사건을 주도하였다. 권영만은 이 사건 이후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하여 1920년 주비단(籌備團)에 참가하여 활동하던 중 잡혀 1922년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권영만이 어떠한 경위로 대한광복회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의의와 평가]

대한광복회는 경상북도 풍기에서 결성된 풍기광복단과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단체로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진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처럼 대한광복회는 의병계열의 인사들과 계몽운동 계열의 인사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만든 단체였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청송 출신 인물 권영만이 지휘장으로서 총사령관 박상진 등과 함께 본부를 이끌었다. 특히 권영만이 주도하였던 경북우편마차암습사건은 여러 활동 중에서도 매우 비중 있는 활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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