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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39
한자 獨立運動
영어공식명칭 Independence Movement
이칭/별칭 국권회복운동,민족운동,민족해방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족 항일운동.

[개설]

독립운동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극복하고자 전개한 민족적 항일운동을 말한다. 일제의 침략과 강점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전개되었다. 경상북도 청송 지역의 독립운동은 청송 출신 인물들이 벌인 활동을 말한다. 독립운동은 한말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으로 전개된 구국운동을 선행 단계로 하고 있다. 구국운동은 일제에게 주권과 영토를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되면서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청송 지역의 독립운동도 이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의병항쟁과 청송]

개항기 의병항쟁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전후해서 일어난 전기 의병과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로 일어난 중·후기 의병으로 나누어진다. 청송 지역의 경우 전기 의병 시기에는 심성지(沈誠之)청송의진(靑松義陣)허훈(許薰)진보의진(眞寶義陣)이 활동하였고, 중·후기 의병 시기에는 청송 지역 사람들이 경상북도 영천에서 일어난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에서 많이 활동하였다.

1896년 3월 창의한 청송의진은 주변 지역의 의진들과 연합하며 1896년 5월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 등 여러 전투를 치르고, 같은 해 7월 화전등전투(花田嶝戰鬪)[꽃밭등전투]를 끝으로 해산하였다. 진보의진은 1896년 4월 허훈이 진보향교(眞寶鄕校)에서 창의하였으나 곧 흩어졌다. 청송 지역의 전기 의병은 심성지청송의진이 격렬하였다.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에서 정용기가 일으켰다. 이때 청송 출신의 홍구섭(洪龜燮), 서종락(徐鍾洛), 남석구(南錫球) 등은 청송 지역에서 많은 군사들을 모집하여 의진에 합류하였다. 의진 초기 청송 출신으로 참가한 사람은 약 60여 명에 이르렀고, 그중 홍구섭, 서종락, 이세기(李世紀) 등 다수가 지도층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2월 최세윤(崔世允) 대장 이후에는 의진을 지대(支隊)별로 배치하여 유격전을 전개하게 하였다. 청송 지역에는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주왕산(周王山)과 철령(鐵嶺)을 근거지로 여러 차례 일본군과 교전을 하다 1910년 안덕면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 패배 이후 활동이 종결되었다.

[계몽운동과 청송]

계몽운동은 대한제국(大韓帝國) 후기 실력 양성을 통해 민족 독립을 달성하려고 하였던 구국운동의 한 형태였다. 계몽운동은 1904년 8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대한국민교육회]의 신교육운동에서 비롯되었으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본격화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언론 등 각 분야로 확대되었다.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서는 교육 분야가 상대적으로 활발하였다.

교육 분야에서는 1906년 고종의 조칙(詔勅)과 경상도관찰사의 훈령(訓令)이 근대 학교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청송 지역에서는 군수의 독려와 향교(鄕校)의 지원으로 1909년경 사립 낙일학교(樂一學校)사립 광덕학교(廣德學校) 등이 설립되어 신지식 보급의 토대가 되었다. 또 학회로는 1908년 3월 결성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의 영향이 컸다. 교남교육회 본회(本會)는 서울에 사범학교를 설립하고, 지회(支會)는 각 지역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진흥할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청송 지역에는 지회 설립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지역 출신 인물로 강래원(姜來遠), 조정식(趙定植), 이회발(李晦發)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청송 지역의 신교육 확산에도 기여하였다.

계몽운동을 주도하였던 단체로는 1906년 4월 설립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1907년 11월 설립된 대한협회(大韓協會)가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청송 지역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만주 망명과 청송]

만주(滿洲)는 중국 동북 지방의 랴오닝성[遼寧省],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등 3성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곳은 일제 침략에 의한 민족 수난기에 한인들이 민족운동을 펼친 주요 무대였다.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망명의 길을 선택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인사로는 진보면 월전리 출신의 박영산(朴榮山)현동면 개일리 출신의 남우락(南佑洛) 두 명뿐이다.

박영산은 1919년 4월 조직된 한족회(韓族會)에 이어 군정부(軍政府)·정의부(正義府) 등에서 활동을 하였으나, 1931년 지린성 반석현(盤石縣)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남우락은 청송에서 일본 순사를 구타하고 지서(支署)를 파괴한 뒤 온 가족을 남겨 두고 랴오닝성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나섰다. 국권 상실의 절박함 속에서 독립을 염원하여 망명길을 택하였다는 사실은 근대 민족운동사에서 길이 되새겨 보아야 할 부분이다.

[대한광복회와 청송]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을 할 수 없게 되자 비밀결사 활동으로 바뀌어 갔다. 그 가운데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가 주목을 받고 있다. 대한광복회는 경상북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光復團)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주요 인사들이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하였다. 이 두 단체의 결합에는 채기중(蔡基中)과 박상진(朴尙鎭)의 역할이 주효하였다. 대한광복회의 본부 조직은 총사령관 박상진, 지휘장 우재룡(禹在龍)과 권영만(權寧萬), 지부장 채기중과 김한종(金漢鍾) 등으로 편성되었다. 초기 회원 수는 약 80명 정도였다.

대한광복회의 목적은 자주독립의 달성이었고, 비밀·암살·폭동·지령 등 4대 행동강령을 제시하였다. 청송 지역에는 진보 출신 권영만이 본부의 지휘장으로 활동하였다. 권영만은 1905년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의병항쟁에도 참여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는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권영만은 동료 우재룡과 함께 1915년 12월 23일 세금을 수송하는 우편마차를 습격하여 관금(官金) 8,700원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대한광복회의 활동은 1918년 1월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의 처단을 계기로 관련자들이 잡히면서 종결되었다. 청송 출신 권영만은 이 사건 이후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하여 활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 잡혀 1922년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권영만이 주도하였던 ‘경북우편마차암습사건(慶北郵便馬車暗襲事件)’은 대한광복회의 활동 중에서도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3.1운동과 청송]

1919년 3월 서울에서 비롯된 3.1운동은 국내외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경상북도 청송 지역의 3.1운동은 청송군 8개 면 중 진보면, 현서면, 청송면[지금의 청송읍] 등 3개 면에서 6회 정도 일어났다. 진보면의 경우는 3월 25일 권태원(權泰源)의 주도로 300여 명의 군중들이 진안리 진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현서면의 경우는 3월 26일과 27일 구산리 화목장터에서 조현욱(趙炫郁), 신태휴(申泰烋), 조병국(趙柄國) 등이 수백 명의 군중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청송면의 경우도 3월 21일과 22일, 4월 6일 등 여러 차례 큰 규모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하나 내용이 자세하지는 않다. 청송 지역의 3.1운동은 3개 면에서 군중들이 질서를 지키며 평화적으로 전개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총격과 탄압으로 해산당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독립에 대한 청송 지역 사람들의 결연한 의지를 잘 보여 주었다.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의 군자금 모집 사건과 청송]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朝鮮獨立後援義勇團)의 군자금 모집 사건은 서간도(西間島)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지원하고자 1920년 9월경 경상북도 김천에서 결성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이 1922년 12월 일제 경찰에 발각될 때까지 경상북도 일원에서 군자금을 거두려다 실패한 사건을 말한다. 그 과정에 특히 청송군 부호들에게 자금 제공이 집중적으로 요구되었는데, 별다른 실효를 보지 못하였다.

1920년 5월경 이종국(李鍾國)은 청도군 매전면의 친족 이정희(李庭禧)와 공모하여, 그해 10월경 청송군 현동면 창양동(昌陽洞)의 자산가 조정식(趙定植)에게 군자금 사령장을 우송하였다. 이에 조정식은 아들 조성우(趙性佑)를 이종국에게 보내어 동정을 살피게 했고, 11월에는 이종국과 이정희가 조정식의 집으로 가서 5천 원 약속어음 2장을 받아냈다.

1년 후인 1921년 11월에는 청송군 파천면 지경동(地境洞)의 조규한(趙圭漢), 부남면 감연동(甘淵洞)의 황보훈(皇甫薰), 파천면 덕천동(德川洞)의 심호택(沈琥澤)에게도 사령서를 보냈지만, 어느 누구도 응하지를 않았다. 현동면 창양동의 조병식(趙炳植)에게도 사령서를 보냈지만, 역시 응함이 없었다. 조정식만이 강압에 못 이겨 1만 원의 약속어음을 냈던 것이다.

[기타 독립운동과 청송]

청송 지역의 독립운동은 흠치교(吁哆敎)의 독립자금 모집 활동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1920년 음력 7월경 차경석(車京錫)을 교주(敎主)로 하는 흠치교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진력한 청송 출신으로는 신동환(申東煥), 신두환(申斗煥), 조규영(趙奎永), 김달희(金達熙), 박주한(朴柱翰), 신상선(申相宣), 신상용(申相鎔), 신철희(申喆熙), 우택락(禹宅洛) 등이 있다. 흠치교는 1901년 강일순(姜一淳)이 전라북도 정읍에서 창시(創始)한 종교로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측면이 강하여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흠치교는 교주를 중심으로 그 밑에 60인의 고문을 두고, 각 고문 밑에 6인조, 6인조 밑에 각 12인조, 12인조 밑에 각 8인조, 8인조 밑에 각 15인조 등을 두는 조직 체계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치성비(致誠費)로 6인조는 30원, 12인조는 15원, 8인조는 10원, 15인조는 5원을 각각 출급하여 일부는 제사비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본부로 보내져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조선회복연구단(朝鮮回復硏究團)명성회(明星會)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로는 파천면 덕천리 출신의 심훈(沈勳)청송면 월막동 출신의 윤동일(尹東一), 부남면 감연리 출신의 박동열(朴東烈) 등이 있다. 특히 윤동일은 무장봉기를 위해 안동경찰서와 안동헌병대의 무기고를 조사하고, 유사시에 공격을 담당하는 특공부(特功部)를 맡아 활동하였다.

안동농림학교는 1933년 4월에 설립된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과 1941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일으키면서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원하고 전쟁에 동원될 군인을 양성하는 군사교육기관으로 변질되었다. 권영동(權寧東), 고제하(高濟夏) 등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학도병(學徒兵)으로 일본 군대에 끌려가 헛된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자고 결의를 하고, 1944년 10월 비밀리에 조선회복연구단을 결성하였다. 조선회복연구단이 결성되기 전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비밀결사 명성회가 활동하였다. 명성회는 1942년 2월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안동농림학교에서 퇴학당한 이정선(李貞善)이 일본 유학 중 독립운동가를 만나 일제가 곧 패망하므로 비밀결사를 결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귀국한 후 1943년 4월에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명성회는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고자 1944년 10월 조선회복연구단과 연대를 모색하였다.

조선회복연구단안동농림학교의 무기고에 있는 총을 탈취한 후 안동경찰서와 안동헌병대를 기습, 점령하여 일본인을 제압하고, 철도와 통신망을 파괴한 뒤 의성 지역으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거사를 준비하던 중 1945년 2월 초 조선회복연구단 단원들이 주고받은 편지 때문에 일부 단원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에 부득이 거사를 연기하였지만, 조선회복연구단명성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졸업 전에는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의하고, 일제의 육군기념일인 3월 10일에 실행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이 비밀결사 단원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단원의 명단이 발견되어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고, 거사 계획도 발각되어 학생들이 체포되면서 거사는 무산되었다.

[의의와 평가]

독립운동의 최고의 가치는 민족의 독립이다. 경상북도 청송 지역의 독립운동도 이와 궤를 같이 하였다. 구국운동에서는 의병항쟁과 계몽운동, 독립운동에서는 대한광복회의 활동과 3.1운동 등에서 잘 나타난다. 청송 지역의 독립운동은 의병항쟁과 3.1운동 부문에서 격렬하였던 반면, 다른 분야에서는 신교육운동을 제외하면 활동이 거의 없었던 것이 산골 오지로서 갖는 지역적 성격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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