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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22
한자 韓末義兵戰爭
영어공식명칭 Righteous Army War in the Late Jos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 항쟁
관련 인물/단체 청송의진|진보의진|산남의진

[정의]

1896년 3월부터 1910년경까지 경상북도 청송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개설]

한국사의 전개 과정에서 의병(義兵)은 임진왜란(壬辰倭亂)·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의병과 개항기 및 대한제국기(大韓帝國期)의 의병이 대표적이다. 그중 개항기 및 대한제국기의 의병은 1894년부터 1896년까지 전개된 전기 의병[제1차 의병 전쟁, 갑오의병, 을미의병, 병신의병]과 1905년부터 1910년경까지 전개된 후기 의병[제2차 의병 전쟁, 을사의병, 병오의병, 정미의병]으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의병은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상도 지역의 경우 안동부(安東府) 관할의 14개 군현에서 양반 유생들이 창의(倡義)하였으며, 그 외 김산(金山)·진주(晉州) 등지에서도 창의하였다.

후기 의병은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여 1905년 9월부터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여 1906년 홍주의진(洪州義陣), 산남의진(山南義陣), 영릉의진(寧陵義陣) 등이 결성되었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등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다.

청송 지역에서는 전기 의병 때인 1896년 3월 결성된 청송의진(靑松義陣)과 같은 해 4월 결성된 진보의진(眞寶義陣)이 일본 세력과 개화파 정권에 반대하여 나라와 고을을 수호하려는 목표로 창의하였다. 후기 의병 때는 1906년 3월 창의하여 활동하였던 산남의진에 청송 지역 인사들이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1908년 이후에는 산남의진의 지역 분대로서 서종락(徐鍾洛)이 이끄는 청송동부진(靑松東部陣)남석구(南錫球)가 이끄는 청송서부진(靑松西部陣)이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다.

[역사적 배경]

전기 의병 때인 1896년 3월 결성된 청송의진과 같은 해 4월 결성된 진보의진은 청송 지역의 유림(儒林)들이 주도하였다. 청송 유림의 학맥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종장(宗匠)으로 한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정재학파(定齋學派)와 서인(西人)의 학풍을 계승한 인물들이 주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청송 유림의 학맥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계승한 정재 유치명의 문인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긍암(肯菴) 이돈우(李敦禹), 석간(石澗) 서효원(徐孝源)을 계승하고 있다. 청송 지역에서 유치명의 문인은 심태지(沈泰之), 심응규(沈應奎), 신진운(申晉運), 이응협(李應協), 서병화(徐炳華), 남석영(南錫永), 남수명(南守明), 권오규(權五奎), 심응지(沈應之) 등이다. 그리고 김흥락의 문인은 권상술(權商述), 신상극(申相極), 김진성(金鎭聲) 등이며, 김도화의 문인은 서석화(徐錫華), 조성태(趙性台), 이상일(李相日) 등이다. 그중에서 서효원은 청송 지역을 대표하는 정재학파의 일원으로 청송 지역의 학풍을 주도하였으며, 서효원의 문인은 서효신(徐孝信), 서효격(徐孝格), 서효달(徐孝達), 김숭진(金崧鎭) 등이었다.

청송 지역에서 서인의 학풍을 계승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 소류(小流) 심성지(沈誠之)는 서인에서 노론(老論)으로 이어지는 청송심씨(靑松沈氏) 가문의 성리학적 전통을 계승하였다. 심성지는 둔와(遯窩) 유양흠(柳養欽)의 문인이긴 하나 서인의 학풍을 계승하여 심능규(沈能奎), 장병두(蔣柄斗), 심의춘(沈宜春) 등의 제자를 양성하여 청송 지역에서 독자적인 학풍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학통을 계승한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이었던 만강(晩江) 서석기(徐錫琦),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였던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인 심동택(沈東澤), 심의도(沈宜燾), 심의상(沈宜商), 심의진(沈宜振) 등도 서인의 학풍을 계승한 청송 유림이었다.

이러한 청송 유림의 학문적 경향은 19세기 후반기 외세 침략에 대응하여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1896년 3월 창의하는 청송의진에도 반영되었다. 청송의진의 구성원을 보면 정재학파의 유생들을 중심으로 결속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의 과정에서 처음 대장(大將)으로 추대되었던 정재 문인 서효원이 사람을 모으는 일에 원숙지 못하다는 이유로 대장직을 사양하였고, 서인의 학풍을 계승한 심성지가 창의장(倡義將)에 올랐다는 것은 그런 사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안동의진(安東義陳)의 소모장(召募將) 유시연(柳時淵)이 청송부(靑松府)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온갖 협박을 일삼고, 심지어 갓 설치된 청송의진의 수기(手旗)와 인신(印信)을 확인하자고 나서는 등 행패를 부릴 수 있었던 것도 청송 유림의 취약성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청송 유림의 학파적 이질성에서 연유하는 취약성을 극복하고 창의한 것이 청송의진이었다.

한편, 진보의진은 1896년 4월 7일 창의하였다. 진보의진의 창의장은 방산(舫山) 허훈(許薰)이고, 부장(副將)은 신상익(申相翼)이다. 허훈은 성재(性齋) 허전(許傳)과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근기학파(近畿學派)와 영남학파(嶺南學派)를 계승한 경상북도 선산[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출신의 유학자였다. 허훈은 일찍이 퇴계 이황을 흠모하여 진보에 전장(田莊)을 마련하고 은거하던 중, 안동의진의 창의장 권세연(權世淵)의 권유로 진보에서 창의하였다. 신상익청송군 파천면 중평리 출신의 유생으로 그의 며느리 김해허씨(金海許氏)가 방산의 손녀였으므로 적극적으로 방산을 지원하며 의병진을 이끌었다.

[경과]

전기 의병기인 1896년 3월 창의한 청송의진진보의진은 청송 지역의 양반 유생들이 주도하였다. 같은 해 5월 고종의 칙유(勅諭)에 따라 청송 지역의 의병들은 의병을 해산하기로 하였으며, 같은 해 8월 해산하였다. 청송의진은 활동 과정에서 부(府) 4면과 현(縣) 5면에 외방장(外防將)을 설치하여 면군체제(面軍體制)를 갖추었으며, 5월 9일 흥해출진소(興海出陣所)와 5월 22일 영덕출진소(盈德出陣所)를 설치하여 주변 의병진과 협조체제를 갖추었다. 5월 13일 의성의진(義城義陣) 및 이천의진(利川義陣)과 연합하여 의성연합의진(義城聯合義陣)을 결성하고, 5월 14일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에서 관군을 상대로 크게 이겼다. 그리고 6월 15일 경주연합의진(慶州聯合義陣)의 결성에 참여하여 6월 18일 경주성전투(慶州城戰鬪)를 벌였으며, 6월 28일 영덕연합의진(盈德聯合義陣)의 결성에 참여하여 7월 13일과 14일 영덕전투(盈德戰鬪)를 벌였다.

후기 의병기인 1906년 3월 영천 지방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창의하여 산남의진을 결성하자 청송 지역에서는 서종락, 남석우(南錫佑), 남석인(南錫仁), 남석헌, 김태언(金泰彦), 조태초, 오상영(吳相泳) 등이 참여하였다. 그 후 청송 지역에서는 선봉장(先鋒將) 홍구섭(洪龜燮), 후봉장(後鋒將) 서종락, 우영장(右營將) 김태언, 좌포장(左炮將) 이세기(李世基) 등이 산남의진에 참가하여 크게 활동하였다. 1908년 2월 5일 산남의진의 대장으로 취임한 최세윤(崔世允)은 북상 계획을 중단하고 지구전(持久戰)을 계획하여 24개 지역 79명으로 구성된 지역 활동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이때 서종락청송동부진를 지휘하며 주왕산(周王山)을 중심으로 청송읍부동면[현 주왕산면], 그리고 부남면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남석구청송서부진을 지휘하며 철령(鐵嶺)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결과]

전기 의병에서 청송의진은 7월 20일경 화전등전투(花田嶝戰鬪)[꽃밭등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각처를 전전하다가 해산하였다. 그 후 청송의진을 주도하였던 창의장 이하 유생들은 은거하였고, 그중 일부와 그 후손 중 일부가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후기 의병에서 청송 지역의 인사들은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08년 2월 최세윤이 대장으로 취임하면서 지역 분대로 편성되어 독자적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8년 7월 최세윤이 잠복하면서 산남의진은 그 구심력을 잃고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청송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서종락이 이끌던 청송동부진남석구가 이끌던 청송서부진으로 편성되어 유격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서종락이 이끌던 청송동부진은 1910년 일본군 수비대 합동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청송군 안덕면 고와실(高臥室)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이때 체포된 의병들은 양손을 묶인 채 고와실 앞으로 흐르는 길안천(吉安川) 백석탄(白石灘)에서 총살되는 등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고와실전투를 끝으로 산남의진의 지역 분대인 청송동부진도 해산하였다.

[의의와 평가]

전기 의병에서 청송의진은 청송 지역의 유림들이 주도하였으며, 후기 의병에서는 청송의진에 참여하였던 유력한 인사 및 그 후손들이 다시 재기하여 산남의진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청송 지역의 한말 의병 전쟁은 전·후기에 걸쳐 대일 항전을 전개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05 행정지명 현행화 부동면 -> 부동면[현 주왕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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