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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299
한자 朝鮮時代
영어공식명칭 Ch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재관

[정의]

1392년 조선 건국부터 1895년 갑오개혁까지 경상북도 청송 지역의 역사.

[개설]

청송 지역은 고려 전기 이후 조선 전기까지 독자적인 군현(郡縣)을 구축하지 못하고 지역의 이합(離合)이 빈번한 상태에 있었다. 1423년(세종 5) 청부현(靑鳧縣)송생현(松生縣)을 합쳐 새로이 청송군(靑松郡)이 되면서 이로부터 진보현(眞寶縣)과 함께 두 고을로 나뉘어 별개의 지방행정단위로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다.

[연혁]

청송 지역은 조선 전기에 들어와 몇 차례의 개편을 거쳐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진보현의 두 고을로 정립하여 갑오경장(甲午更張)까지 유지되었다. 먼저 청송도호부가 되는 지역의 일부는 고려 성종 이래 예주(禮州) 속현(屬縣) 청부현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었는데, 1394년(태조 3)에 경상도의 군현 통폐합 과정에 예주(禮州) 속부(屬府)인 보성부(甫城府)에 병합되었고, 이때 보성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어 비로소 독립 군현이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고려시대 이래 감무가 파견되어 독립 군현으로 유지되어 오던 송생현에 인접한 안덕현(安德縣)이 병합되었다. 한편 보성이 어느 시기에 군(郡)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414년(태종 14)『태종실록(太宗實錄)』의 기록에 보성군(甫城郡)이 언급되고 있어, 1394년(태조 3년) 통폐합 과정에 감무를 파견한 후 머지않은 때에 군으로 읍격(邑格)이 조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416년(태종 16)에는 전국의 음(音)이 서로 비슷한 고을의 명칭을 변경하는 과정에 전라도 보성(寶城)과의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고을 이름이 신라 경덕왕 때 처음 부여된 옛 지명인 진보(眞寶)로 개명되었으며, 이 시기에 읍격이 현으로 조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18년(세종 즉위년) 이조(吏曹)에서 진보현의 속현으로 있던 청부현이 세종의 왕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청부현을 군으로 승격시킴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제출하자 청부현진보현 두 고을의 명칭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고을명을 청보(靑寶)로 하고 군으로 승격하였다. 또한 이때에 치소(治所)도 청부로 옮기게 되었다. 관아가 군의 중심지에 있지 못하고 한쪽에 위치하는 관계로, 옛 진보현 백성들이 관아 왕래에 불편하고 행정상에도 불편한 점이 많다는 청원을 계속하자 1423년(세종 5) 진보를 떼어내어 현으로 만들고, 청보군은 안덕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고 있던 송생현을 합쳐 청송군(靑松郡)으로 개칭하였다. 청송의 고을명은 병합된 두 고을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들었으며, 이로써 처음 ‘청송’이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 또한 본 읍인 송생현이 병합되면서 속현인 안덕현도 자연스럽게 청송군의 속현이 되었다.

1459년(세조 5) 세조의 모후인 소헌왕후 심씨의 내향임을 고려하여 읍격을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이로부터 청송도호부는 갑오경장으로 다시 청송군이 되기 전까지 437년 동안 도호부로서 읍격을 유지하였다. 1423년(세종 5) 현으로 독립한 진보현은 1474년(성종 5) 고을 사람 금맹함(琴孟諴)이 현감(縣監) 신석동(申石同)을 모욕하였다는 이유로 폐현되어 청송도호부에 합쳤다가 1478년(성종 9)에 복현되었으며, 이후 갑오경장으로 진보군이 되기 전까지 현으로서 읍격을 유지하였다.

[지역적 특색]

『관풍안(觀風案)』이나 홍여방(洪汝方)의 『찬경루기(讚慶樓記)』등에 청송은 “풍속이 검소하고 솔직한 것을 숭상한다.”, “백성들은 순박하고 풍속은 후하다.”고 하였다. 또한 “산의 지세(地勢)는 기복(起伏)이 있고, 냇물은 서리가 돈다.”고 하였으니 전반적인 풍속은 검소하고 부지런한 것을 숭상하며, 백성들은 순박한 데다 습속이 두터운 지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지리지나 읍지에는 토지가 척박할 뿐만 아니라 바람이 찬데다, 부세(賦稅)조차 무거워 백성들이 곤궁하게 살고 있음을 전하고 있어 거주 인구가 많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옛 청부의 호수가 36호, 인구가 217명, 옛 송생(松生)의 호수가 50호, 인구 343명, 안덕(安德)의 호수가 48호, 인구가 255명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청송 지역에는 토착적 기반을 배경으로 다양한 학풍을 수용하며 독자적 위상을 확보한 사족(士族)의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는 청송의 빼어난 자연환경이 지역뿐만 아니라 여타 지역 출신 사림(士林)이 심신을 연마하며 자연과 합일된 세계관을 확립하는 데 더 없이 좋은 조건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청송은 세파에 물들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며 은둔하기를 바라는 처사형(處士型) 사림에 적합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정치와 군사]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궁극적 지향점이란 왕권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앙 집권화와 농민의 효과적인 지배에 있었다. 그것은 군현 행정을 책임진 ‘수령의 칠사(七事)[농상성(農桑盛), 호구증(戶口增), 학교흥(學校興), 군정수(軍政修), 부역균(賦役均), 사송간(詞訟簡), 간활식(姦猾息)]’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듯이 인구 증가와 농업 생산성 향상, 공정한 조세(租稅)·공부(貢賦)의 부과, 주민의 교화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각 고을에 파견된 수령은 지방 행정의 궁극적 지향점을 실현하는 최일선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청송도호부진보현의 속현 청부현으로 있다가 세종조에 진보현과 합쳐 군으로 승격하여 청보군이 되었다가 다시 청송군으로 변화하면서 종4품 군수(郡守)가 주재하는 고을이 되었다. 또한 군으로서의 읍격에 맞게 향교(鄕校)를 관리하고 교육을 담당하는 관원인 종9품 훈도(訓導) 1인이 있었다. 이후 청송은 소헌왕후의 내향이라는 이유로 세조조에 도호부로 승격하면서 관원으로 고을의 수령인 종3품 도호부사(都護府使) 1인이 파견되었고, 도호부로 승격하면서 향교의 관리와 교육을 담당하는 관원도 승격되어 종6품 교수(敎授) 1인을 두었다. 한편, 진보현은 1423년(세종 5) 현이 된 이래 종6품 현감이 수령으로 파견되었으며, 향교의 관리와 교육을 담당하는 관원인 종9품 훈도 1인이 있었다.

조선시대 군현은 읍격과 수령의 관등에 따라 인적 구조와 물적 정액(定額)에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정수(丁數)는 법제상 정해진 것이며, 실제는 읍세(邑勢)의 융성과 쇠잔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우선 수령의 하부 행정체계로서는 읍사(邑司)와 인리청(人吏廳)을 중심으로 한 향리(鄕吏) 조직, 유향소(留鄕所)를 중심으로 한 재지사족(在地士族) 및 면·리 행정을 담당한 면임(面任)과 이임(理任)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또한 서울의 경저(京邸)와 경재소(京在所), 감영(監營)이나 병영(兵營) 등의 영리(營吏)·영저리(營邸吏)와 계통화되어 있으며, 그 밑에 각종 천역(賤役)을 담당하는 관노비(官奴婢)가 있었다.

조선 후기의『읍지』「관직조」에는 각 읍마다 수령 이하의 관원(官員)과 이예(吏隸)가 정액되어 있다. 여기에는 향청(鄕廳)의 임원인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군관(軍官), 인리(人吏), 지인(知印), 사령(使令), 관노(官奴), 관비(官婢) 등의 정원이 실려 있는데, 그 명칭과 정액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먼저 청송도호부의 경우에는『청송부읍지(靑松府邑誌)』[1788~1790년경]에 향청의 좌수 1인, 별감 3인, 관속(官屬)으로 군관 25인, 인리 30인, 지인 12인, 사령 15명, 관노 58구, 관비 43구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보현의 경우에는『진보현읍지(眞寶縣邑誌)』[1783~1787년]에 좌수 1인, 별감 2인, 관속으로 군관 20인, 인리 19인, 지인 9인, 사령 7명, 관노 26구, 관비 28구의 정원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기본구획으로서의 군현은 일정한 구역에 일정한 주민, 그것을 통치하는 행정조직과 관아,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군현 관아의 소재지 읍치(邑治)는 군현 행정의 중심으로 대개 주위는 성곽으로 두르고 그 안에 수령 관아를 비롯하여 각종 관청, 누정(樓亭), 창고 등이 배치되어 있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청송도호부진보현은 산악 지형에 있었던 관계로 자연 지형을 활용할 수 있어 읍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조선 정조조에 간행된 청송도호부진보현의 읍지에 따르면 청송도호부의 관아 건물은 객사(客舍)인 운봉관(雲鳳館), 동헌(東軒)인 신민헌(新民軒)을 위시하여 향사당(鄕射堂), 장관청(將官廳), 군관청(軍官廳), 부사(府司), 인리청(人吏廳) 등이 있었다. 진보현의 관아 건물은 객관(客館), 동헌(東軒)인 봉서헌(鳳棲軒), 향사당(鄕射堂),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官廳), 인리청 등이 있었다. 창고는 청송도호부에 부창(府倉), 남창(南倉), 현창(縣倉), 서창(西倉), 대동고(大同庫)가 있었고, 진보현에 읍창(邑倉), 북창(北倉)이 있었다.

조선 전기의 사전(祀典)[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행하는 각종 제사] 확립과정에서 왕권을 정점으로 지방의 행정체계는 물론 주민의 신앙체계까지도 관권 주도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즉, 조선왕조는 사전을 대·중·소사(大·中·小祀)로 나누고 수도를 중심으로 관련 군현별로 갖추게 되었다. 그 결과, 특정 사전을 제외하고는 모든 군현이 통일된 사전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고을마다 진산(鎭山)[청송도호부 방광산(放光山), 진보현 남각산(南角山)]이 지정되고, 향교에 소재한 문묘(文廟) 외에도 관청의 서쪽에 사직단(社稷壇), 북쪽에 여단(厲壇), 동쪽에 성황사(城隍祠) 등 1묘(廟)·1사(祠)·2단(壇)이 설립되었다. 종래 잡다한 민간신앙은 비유교적인 음사(淫祀)로 규정하여 금단하였다.

군현 단위의 사전은 군현행정의 수장인 수령이 주재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고을을 대표하였다. 또한 고을마다 국왕의 상징인 전패(殿牌)를 객사에 모시고, 지방 관민이 여기에서 군신 관계의 의식을 수행하였다. 청송도호부진보현도 이러한 국가적인 정책에 맞추어 1묘·1사·2단을 갖추고 수령의 주재하에 매년 사전을 행하였다.

조선시대 지방 군현의 수령은 그 지역의 군사권도 동시에 갖고 있어 일반적으로 군직을 겸임하였는데,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의 경우 보임되는 품계에 따르면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진보현감(眞寶縣監)은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의 지방 군사체계인 진관 체제(鎭管體制)에 따르면 청송도호부진보현은 제진(諸鎭)에 속하여, 거진(巨鎭)인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의 지휘를 받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청송과 진보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읍성이 없었을 뿐 아니라 성지(城池), 관방(關防), 진보(鎭堡)도 없었다. 다만 진보현신법산봉수(神法山烽燧) 1개소가 유일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신법산봉수진보현 서쪽 10리[약 4㎞]에 위치하였으며, 동쪽으로 영해 광산봉수(廣山烽燧), 서쪽으로 안동 약산봉수(藥山烽燧)에 연결되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해 조선 전기 관찬지리지에는 진보현남각산봉수(南角山烽燧) 1개소가 기재되어 있어, 16~17세기 무렵에 남각산에 설치된 봉수가 신법산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사회와 경제]

조선 전기 자료인『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나타난 청송도호부의 호구(戶口)에 의하면 옛 청부 36호에 인구 217명, 옛 송생 50호에 인구 343명, 안덕 48호에 인구 255명을 합하여 134호에 815명으로 나타나 있다. 앞서 간행된『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에는 36호 373명으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호구 통계는 실제 인구의 일부만 파악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 호구 수는『세종실록지리지』의 통계 수보다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조선 전기까지 청송도호부의 전신인 청부현이 속현으로 존재할 정도로 규모가 작은 고을에 불과하였고, 소헌왕후의 내향으로서 군으로 승격되는 과정에 송생과 안덕을 합병할 수밖에 없었던 데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진보현의 경우『세종실록지리지』에 78호 526명으로 기록되어 있고,『경상도지리지』에는 78호 994명으로 되어 있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과장된 호구 통계일 수도 있다. 즉, 고려시대 왜구(倭寇)의 침입으로 한때 거주민이 거의 없는 공지(空地)였던 진보현 일대가 오히려 청송도호부보다 많은 인구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 것은 자료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조선 후기의 청송 지역 인구에 대해서는 『읍지(邑誌)』등의 자료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정조조에 간행된 청송도호부의 읍지에 1786년(정조 10) 병오년 호적대장의 원호(元戶)에 의하면 3,241호에 1만 2409명으로 조사되었다. 진보현의 읍지에 1786년(정조 10) 병오년 호적대장의 원호에 의하면 1,318호에 6,157명으로 조사되었다. 이 통계 수치는 식년(式年)에 이루어진 호적대장 작성과정에 조사된 수치이나, 당시의 호적대장 작성 경향으로 고려해 보면 실제 호구 수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수치는 조사된 호구의 2배 이상이었을 것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호적대장의 호구 파악 방식을 핵법(覈法)과 관법(寬法)으로 나누었다. 핵법은 1호도 누락 없이 호구의 실제 숫자를 파악하는 것이고, 관법은 마을 자체에서 스스로 장부를 만들어 요역(徭役)과 부세(賦稅)를 할당하게 하고, 관에서는 그 대강을 들어 총수를 파악한 뒤 균평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정약용은 당시 실정을 감안하여 지방관은 관법을 따르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다. 이같이 겉으로는 1호(戶) 1구(口)도 빠짐없이 민수(民數)를 파악한다는 이른바 ‘핵법’을 표방하였지만, 실제 운영은 관법적인 형태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핵법의 명분과 관법의 현실 사이에 위치한 조선왕조의 호구 파악의 1차 목적은 국역(國役)과 부세 운영을 위함이었다. 따라서 3년 단위로 파악되는 호구의 총수는 중앙 정부의 방침에 따라 일정한 규모로 조절되고 있었으며, 이는 호적대장의 호구 수와 실제 호구 수의 괴리를 가져오는 원인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청송 지역의 경지 면적은 전답을 합하여 1,315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8.7%에 해당하는 115결이고, 밭이 91.3%인 1,200결이었다. 진보현의 경지 면적은 전답을 합하여 877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9.3%에 해당하는 82결이고, 밭이 90.7%인 795결로 두 지역 모두 척박한 산악 지역에 위치하여 경지 면적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주로 밭농사 위주로 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군현 지도집인『광여도(廣輿圖)』청송도호부진보현의 주기(註記)에 의하면 청송도호부의 전답은 세종조에 비해 약 1.8배 늘어난 2,333결인데, 이 중 논이 23.4%인 546결, 밭은 76.6%인 1,787결이고, 진보현의 전답은 세종조에 비해 약 2배 늘어난 1,745결인데, 이 중 논이 13.9%인 242결, 밭은 86.1%인 1,503결로서 상대적으로 조선 전기에 비해 논의 비율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지형조건의 제약을 극복하지 못한 채 밭농사 위주로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선 전기 청송 지역의 토산물은 오곡(五穀)과 조, 메밀, 뽕나무, 삼[麻]이다. 토산(土産) 공물(貢物)은 꿀, 밀[黃蠟], 칠(漆), 종이, 자리[席], 여우가죽, 노루가죽, 돼지털, 송이버섯, 석이(石茸), 느타리[眞茸], 배, 잣, 인삼, 백단향(白檀香), 지초(芝草)가 있다. 약재(藥材)는 백복령(白茯苓), 마[山藥]이며, 토산은 신감초(辛甘草), 백토(白土), 주토(朱土)가 난다고 하였다. 진보현의 토산물은 벼, 기장, 콩, 조, 메밀, 뽕나무, 삼이다. 토산 공물은 꿀, 밀, 노루가죽, 여우가죽, 칠, 지초(芝草), 송이버섯이 있다. 약재는 백복령으로 모두 지형조건을 이용한 산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성씨와 재지세력]

청송에는 고려시대 이래로 토착세력인 토성(土姓)을 주축으로 재지적 기반을 갖춘 세력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세종대에 편찬된『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와『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청송군에 심(沈), 김(金), 전(全), 장(蔣), 신(申) 등 5개 토성이 있었다. 또한 송생현에 윤(尹), 노(盧), 전(全)의 3개 토성과 김(金)[『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全)], 박(朴), 이(李)의 3개 내성(來姓) 및 촌락성(村落姓)인 정(鄭)이 있었다. 안덕현에는 김(金), 이(李), 손(孫), 전(全), 장(蔣) 등 5개 토성의 존재가 확인된다. 당시 분리되어 있던 진보현에는 조(趙), 이(李), 백(白), 전(全)[『세종실록지리지』에는 김(金), 전씨는 속성(續姓)], 박(朴)의 5개 토성과 파질(巴叱) 및 춘감부곡(春甘部曲)의 성으로 오(吳)가 있었다.

이러한 토성으로 구성되었던 청송 지역의 재지세력은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이 혼재되어 있는 양상을 띠고 있었으나, 16세기 중·후반 이후 사족이 향촌 사회에서 중소 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과 사족으로서의 신분적 배경을 가지고 향촌 사회 운영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사족 중심으로 재지세력이 재편되게 된다. 특히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균분상속제(均分相續制) 등 고려시대 이래의 전통적인 사회제도에 따라 토착세력인 토성에 더하여 지역별로 유입되었던 다수의 이성(異姓)들이 부계 친족을 중심으로 한 가족제도, 자녀 차등 상속제, 장자 봉사(長子奉祀), 대가족제 등의 사회제도 변화에 따라 지역에서 정착 방안을 모색하게 되면서 성씨의 구성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청송에는 청송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심씨를 비롯해 김씨(金氏), 전씨(全氏), 장씨(蔣氏), 신씨(申氏) 등이 전통적인 성씨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송생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에 윤씨(尹氏) 외에 노씨(盧氏), 전씨(全氏), 정씨(鄭氏), 김씨(金氏), 박씨(朴氏), 이씨(李氏)가 나타났다. 또한 안덕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에 김씨(金氏), 이씨(李氏), 손씨(孫氏), 전씨(全氏)[또는 장씨(蔣氏)], 설씨(薛氏), 조씨(趙氏), 권씨(權氏), 민씨(閔氏), 신씨(申氏), 남씨(南氏), 서씨(徐氏) 등 다양한 성씨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토착세력의 기반이 형성된 중심지보다는 외곽지에서 그들의 기반을 확보하기 용이하였던 때문일 것이다. 또한 진보현에는 조씨(趙氏), 김씨(金氏), 박씨(朴氏), 백씨(白氏), 전씨(全氏) 및 오씨(吳氏)의 전통적인 성씨 외에 안동권씨(安東權氏), 의성김씨(義城金氏), 안동김씨(安東金氏), 영해신씨(寧海申氏), 죽산안씨(竹山安氏), 연안이씨(延安李氏), 재령이씨(載寧李氏), 월성이씨(月城李氏), 원주이씨(原州李氏), 춘천박씨(春川朴氏), 전주최씨(全州崔氏), 의령남씨(宜寧南氏), 동래정씨(東萊鄭氏) 등 다양한 성씨가 세거하고 있었다. 이들이 청송 지역을 주도하는 사족으로서 확고한 토대를 구축하고 있었음은 이후의 읍지들인『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나『청기지(靑己誌)』에도 그들이 거의 변함없이 등장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인물]

1937년 간행된 『청기지』 인물조(人物條)에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후기에 이르는 시기에 청송에 거주했거나 직·간접적인 관련을 가진 인물들을 선정(先正), 유현(儒賢), 학행(學行), 유행(儒行), 문행(文行), 행의(行誼) 등 모두 20개 항목으로 분류한 833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청송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인물로 간주할 수 있다. 기록된 인물들의 성씨를 분석해 보면 모두 36성(姓)에 달하며, 이는 본관을 무시하고 합산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훨씬 늘어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지역을 대표하는 위상을 확보하고 있던 성씨는 청송심씨(靑松沈氏)함안조씨(咸安趙氏)로 각각 138명과 175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두 성씨 외에 인물을 배출했던 성씨는 80명의 영양남씨(英陽南氏)를 비롯해 85명의 안동김씨, 의성김씨, 경주김씨(慶州金氏)가 있다. 또한 85명의 진보이씨, 가평이씨(加平李氏), 경주이씨(慶州李氏)와 37명의 달성서씨(達城徐氏), 22명의 아산장씨(牙山蔣氏), 20명의 평산신씨(平山申氏) 및 27명의 밀양박씨(密陽朴氏), 경주박씨(慶州朴氏), 21명의 경주최씨(慶州崔氏), 해주최씨(海州崔氏)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밖에 16명의 안동권씨, 13명의 여흥민씨(驪興閔氏), 9명의 파평윤씨(坡平尹氏), 17명의 장수황씨(長水黃氏), 창원황씨(昌原黄氏), 상주황씨(尙州黃氏), 12명의 청주정씨(淸州鄭氏), 동래정씨, 10명의 전주류씨(全州柳氏), 풍산류씨(豊山柳氏)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그 외에도 다수의 성씨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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