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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287
한자 高麗時代
영어공식명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김호동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 왕조가 지속하였던 기간 동안 경상북도 청송 지역의 역사.

[개설]

고려시대 기간 동안 여러 차례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고을 명칭의 변경과 통폐합이 잦았다. 이에 청송 지역에는 청부(靑鳧), 보성(甫城), 안덕(安德), 진보(眞寶), 진안(眞安), 송생(松生) 등의 고을이 두어졌고, 이들 고을은 인근 큰 고을의 속현(屬縣)으로 주로 존재하였다.

한편, 고려 전기에 청송 지역을 비롯한 지방 세력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를 하기 위해 본관제(本貫制)를 실시하였다. 또 고려 후기부터는 옛 청송 지역의 토성(土姓) 세력들이 중앙에 진출하며,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 사이에 재지사족(在地士族) 가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행정 구역의 변천]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940년경(태조 23) 대대적인 지방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당시 행정구역 개편은 호족(豪族) 세력의 공과(功過)를 감안해 진행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일대에 있던 적선현(積善縣)부이현(鳧伊縣)운봉현, 지금의 청송군 진보면·파천면 일대에 있던 진보현(眞寶縣)과 지금의 청송군 진보면 및 영덕군 달산면에 있던 진안현(眞安縣)을 합쳐 보성부(甫城府), 지금의 청송군 안덕면·현동면·현서면 일대에 있던 연무현(緣武縣)안덕현(安德縣)으로 각각 개편하였다. 특히 보성부진보현·진안현 일대에서 활약하였던 재암성(載巖城) 성주(城主) 선필(宣弼)이 왕건(王建)에 귀부(歸附)했기 때문에, 고려 전기 고을이 합쳐져 승격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부이현은 757년(신라 경덕왕 16) 적선현 때부터 고려 전기까지는 야성군(野城郡)[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의 영현(領縣)이었다. 10세기 동안 몇 차례 고을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10세기 중·후반에는 운봉현(雲鳳縣), 986년(성종 5)에는 청부현(靑鳧縣)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때 청부현이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일대에 두어졌던 예주(禮州)의 임내(任內), 즉 속현(屬縣)이 되었다. 보성부는 1018년(현종 9) 예주의 임내가 되었다. 하지만 보성부는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관사(官舍)가 타 없어지고, 살고 있는 백성들이 흩어지는 수난을 당하였다. 안덕현연무현 시절인 757년(신라 경덕왕 16)부터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임동면 일대에 있던 곡성군(曲城郡)의 영현이었다. 그러다 1018년(현종 9)부터는 길주(吉州)[1030년(현종 21)부터 안동부(安東府)로 변경]의 속현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안덕현은 1390년(공양왕 2) 속현에서 독립되어 비로소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지금의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주왕산면 일대에 두어진 송생현(松生縣)도 1018년(현종 9) 예주의 속현이 되었다. 그런데 송생현은 1018년(현종 9) 기록에 처음 등장하여 고대와 고려 전기까지의 내력은 전혀 알 수 없다. 즉, 안덕현을 제외하고 청송 지역에 두어졌던 고을은 고려시대 동안 예주의 임내로 존재하며, 끝내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한편, 옛 청송 지역을 관할하던 예주는 1259년(고종 46) 덕원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가 되었고, 이후 예주목(禮州牧)으로 승격되었지만, 1310년(충선왕 2) 전국의 여러 목을 없애면서 영해부(寧海府)가 되었다.

고려시대 동안 청송 지역에 있었던 여러 고을은 통일신라시대 9주(州) 5소경(小京) 체제에서는 상주(尙州)와 명주(溟州)에 편제되었다. 그러다 995년(성종 14) 전국을 10도(道)로 개편하면서 영남도(嶺南道)에 편제되었다. 이후 청송 지역을 포괄하는 상위의 광역 행정구역도 여러 차례 개편되었다. 1106년(예종 1)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 1171년(명종 1) 경상주도(慶尙州道), 그 뒤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를 거쳐, 1314년(충숙왕 1) 비로소 경상도(慶尙道)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1895년까지 청송 지역은 경상도에 편제되었다.

한편, 고려시대 동안 고을 하부에는 특수한 지방 행정구역으로 향(鄕)·소(所)·부곡(部曲)이 두어졌다.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세(賦稅) 행정에서 불리한 처우를 받았고,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은 상대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 또한 특정한 역(役)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향·소·부곡은 조선시대 이후 면(面)과 리(里)로 개편되면서 소멸되어 갔다. 옛 청송 지역에도 고려시대 동안 향·소·부곡이 존재했을 것이라 추정되나, 현재 문헌상으로는 진보현 지역에 있었던 천숙부곡(泉宿部曲), 춘감부곡(春甘部曲), 파질부곡(巴叱部曲), 고을마부곡(古乙亇部曲), 성부부곡(省夫部曲) 등 다섯 부곡만 확인된다.

[인물과 토성]

남북국시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신라 왕실의 왕위 다툼은 심화되었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이에 지방의 성주(城主)·장군(將軍)·촌주(村主)들이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독자 세력화를 도모하였는데, 이들을 호족이라고 한다. 호족들은 후삼국이 정립되고 대결하는 과정에서 상호 간 경쟁 또는 이합집산하였는데, 청송 지역의 호족들은 왕건의 고려에 귀부(歸附)하였다. 당시 청송 지역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던 선필과 홍술(洪術)도 일찍이 왕건에 협조하였던 인물이다. 선필은 이 무렵 재암성의 장군으로 930년(태조 13) 고려에 귀부하였고, 홍술은 922년(태조 5) 고려에 귀부한 후 문소군(聞韶郡)[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으로 가서 의성부성주장군(義城府城主將軍)으로 활동하며 견훤을 막다 전사하였다.

이처럼 고려는 왕건을 중심으로 선필·홍술과 같은 지방 호족 세력들을 규합하여 세워진 새로운 형태의 왕조였다. 따라서 후삼국 통일 후, 왕조 유지의 최대 관건은 호족 세력들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와 관리였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제도가 마련되는데, 토성분정(土姓分定)을 통한 본관제도 그중 하나이다. 즉, 해당 고을의 유력한 호족들에게 성을 부여하고, 그들의 근거지가 되는 고을을 본관으로 삼게 하였던 것이다. 본관제는 고려시대 동안 지방 세력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비록 조선 전기에 편찬된 것이지만, 고려시대 때 존재하였던 각 고을의 토성들이 망라되어 있는 자료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청송의 경우 청부현의 토성으로 심(沈), 김(金), 전(全), 장(蔣), 신(申)이 확인된다. 송생현의 토성으로 윤(尹), 노(盧), 전(全)과 내성(來姓) 전(全), 박(朴), 이(李) 및 촌성(村姓) 정(鄭)이 나타나 있다. 안덕현의 토성으로 김(金), 이(李), 손(孫), 전(全), 장(蔣)이 확인된다. 진보현의 토성으로 조(趙), 이(李), 김(金), 박(朴), 백(白)과 속성(續姓) 전(全), 춘감부곡과 파질부곡의 부곡성(部曲姓)인 오(吳)가 확인된다.

호족 세력이 주축이 되었던 토성 세력은 고려 전기까지 자신들의 근거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였으나, 983년(성종 2) 이직(吏職)이 크게 개편되면서 향리층(鄕吏層)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 향리는 토착적이고 세습적인 성향을 가지며, 해당 고을의 행정 실무를 장악하였다. 또한 군현(郡縣)의 토성은 과거제도를 매개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고, 고려시대 동안 급변하는 정세 속에 새로운 예비 관료층으로 존재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 후기부터 청송의 몇몇 토성 가문은 상경종사(上京從仕)를 통해 중앙의 관료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 내에서의 위상도 높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토성 세력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의 향리층에서 벗어나 유력한 사족(士族)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고려 후기 향리직을 거쳐 명문 사족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가문으로는 청부를 본관으로 하였던 청송심씨(靑松沈氏)가 있다. 이 가문 출신의 심홍부(沈弘孚)는 충렬왕 대에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하였던 인물이다. 이때부터 후손들의 출사(出仕)가 지속되었고,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에는 심덕부(沈德符)[1328~1401], 심원부(沈元符) 형제가 배출되었다. 심덕부는 고려 후기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져, 이 가계는 일약 조선의 명문대가로 성장하였다. 심원부도 고려 후기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관직에 나가지 않은 채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진보현의 토성으로는 진보이씨가 영남 지역의 대표 명문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이 가문 출신의 이자수(李子脩)는 1330년(충숙왕 17) 향공거인(鄕貢擧人)으로서 잡과인 명서업(明書業)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홍건적의 난 때 공을 세워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그런데 이자수의 선대는 보성[진보]의 호장(戶長)을 세습하던 향리층이었다. 이자수 대에 본격적인 출사가 시작되었고, 이후부터 후손들이 안동과 예안(禮安)에 세거하며 영남의 대표적인 명문 가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 외 공민왕 대에 문과에 급제한 조용(趙庸)[?~1426]이 진보현의 토성 출신이었다. 고려 후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우왕 때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던 신예(申藝)는 영해 출신이었다. 하지만 고려가 망하자 영해의 속현인 보성으로 낙향하였고, 조용의 후손들은 조선시대 동안 진보 지역을 대표하는 재지사족 가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08 행정지명 현행화 부동면 -> 주왕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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